늦은 오후에 설악산에 들어선다. 한겨울의 산은 묵언수행 중이다. 채도를 낮춘 겨울 산이 장대한 수묵화를 펼쳐 놓았다. 무성한 녹음으로 치장했던 수풀은 농도를 달리한 갈색으로 통일감을 연출한다. 독야청청 소나무도 색조를 낮추어 보조를 맞췄다.
권금성에 오르기 위해 케이블카를 기다린다. 나목 사이로 숲의 속살이 보인다. 담백하다. 생물도 무생물도 본연의 색채는 저렇듯 고요하고 차분한 빛깔인 걸까.
왼쪽으로 하얀 빙벽이 몇 개 보인다. 얼어붙은 비룡폭포와 육담폭포 등의 일부인 듯하다. 폭포수의 결빙이 암벽의 꽃처럼 하얗게 피어 있다. 강추위 속에서 겨울 산은 일치된 모습으로 단결했다. 암벽도 물줄기도 정지된 화면 같다.
사방이 한눈에 들어오는 권금성에 도착하니 삭풍이 위협적이다. 휘몰아치는 광풍에 균형을 잡기가 힘들다. 눈앞의 절경을 놓치기 아까워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너럭바위를 가로지른다. 병풍 같은 석벽을 피신처로 삼아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바람에 맞선다.
유구한 세월에 살청된 기암괴석들이 장관壯觀이다. 지근거리는 아니지만 남서쪽의 공룡능선과 서북쪽 울산바위를 눈높이에서 바라보며, 자연이 빚어낸 비경에 한껏 취해 본다.
권금성權金城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옹금산석성擁金山石城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권權·김金의 두 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난리를 피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전설이 있는 성터이다.
바람을 등지고 내려오는 길,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토왕성 폭포가 보인다. 시원하게 떨어지던 폭포수가 낙하를 멈추고 바위의 침잠에 동참했다. 거대한 빙벽이 만개한 겨울꽃이다. 푸르도록 하얀 얼음꽃이 눈부시다. 단단하게 내면을 다지는 바위의 침묵에 동조하고 있다. 저토록 깊이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는 모습이라니!
고통이 드리운 그늘에 있을 때, 사정을 알게 된 몇몇 교우들이 염려와 기도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남다르게 느껴졌던 위로를 기억한다. 나보다 앞서 더 큰 고난을 겪었던 지인의 모습이었다. 말없이 잡아주는 손길과 심연의 슬픔을 헤아리는 듯한 눈빛이 마음을 어루만졌다. 공감의 온기였다.
그 순간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그녀의 비애가 맞잡은 손처럼 내 마음에 겹쳤다. 결이 다른 아픔이지만 애끓는 마음은 닮음이었으리라.
희푸른 얼음꽃을 바라보면서 한 편의 시를 떠올린다. 상징적인 의미에 다가가지 못하고 언저리를 맴도는 수준으로 마음에 담았던 시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 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조정권의 <산정묘지> 중에서
해빙이 되면 이 산은 각기 고유의 빛을 내뿜는 생명으로 활기가 넘치리라. 함묵으로 바위와 동렬同列에 섰던 폭포도 새로운 낙화를 꿈꾸리라. 시원한 물줄기로 바위에 푸르름을 입히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