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2025.01.05 15:01:19

고미화

무심수필문학회 사무국장

문득 가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명쾌한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혼란스러운 국내정세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 탓이라는 핑계를 찾아본다. 그를 만날 목적만으로 길을 나선 적은 없었다. 지칠 줄 모르는 파도의 춤사위가 그립다거나, 적당히 한산한 풍경을 찾아 나섰다가 묵묵히 서 있는 그를 마주하곤 했다. 매서운 칼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와 상쾌하게 씻어주는 겨울 바다에서, 광활한 수면에 내리쬐는 햇살에 반짝이는 낮별 같은 윤슬을 쫓다가 잊었던 친구를 만나듯 해후하곤 했다.

짙푸른 물결이 큰 동선으로 이어지는 동해에서도, 하얀 파도가 잔망스럽게 넘실대던 남해에서도, 황금빛 노을의 후광을 등지고 어스름에 잠기던 서해에서도 그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우직하게 고향을 지키는 지기처럼. 든든한 거수巨帥처럼.

서해안을 향해 달리는 차 안에서 마주하는 하늘이 변화무쌍하다. 잿빛 하늘에 잠겨 있는 구간을 지나자, 하얀 눈발이 휘날리는 지역에 들어선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곳도 있고, 짙고 엷은 회색 구름층 사이로 여린 겨울 해가 얼굴을 내미는 곳도 있다.

변산반도에 들어섰다. 굽은 해안선을 따라가며 드넓은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트인다. 해안가 암벽에 부딪힌 파도가 장렬하게 산화한다. 하얀 겨울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산산이 흩어지는 파도의 꿈이 눈부시다.

철 지난 모래사장이 차분하다. 어린 남매와 거니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평온해 보인다. 해변 암석 위를 넘나드는 파도가 제 영역을 점점 넓히고 있다. 만조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다. 채석강을 나와 격포항에 주차했다.

정박한 어선들이 항구에 가득 찼다. 층암절벽을 지나 바닷길을 걷는다. 길게 누운 방파제 끝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뭍과 바다의 어름에서 여전히 제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견고한 콘크리트 블록이 파도를 안았다가 돌려보낸다. 숙명을 넘어서지 못하는 파도의 무모한 도전이 안쓰럽다. 옅은 회색 구름 틈을 뚫고 감빛 햇살이 퍼진다. 스포트라이트처럼 내리쬐는 빛살이 수평선으로 잠수한다. 쏟아지는 광선의 짧은 길이가 저물녘의 때를 예고해 준다. 다가오는 밤 풍경을 상상해 본다. 몇 차례 이곳을 다녀가면서도 깜깜한 밤바다를 지키는 등대의 노고를 간과했다. 눈앞의 황홀한 풍경을 만끽하면서도,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보려는 사유가 부족했다.

호호 망망한 바다에서 다양한 파고로 넘실대는 우리 삶의 바다를 본다. 인생 여정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출항과 귀항을 반복하며 '하루'라는 항구를 드나드는 과정의 합이 우리의 삶이다.

등대는 사물의 경계가 허물어진 어둠 속에서 선박과 항공기의 안전한 운항을 도와준다. 육지의 유사한 빛과 혼돈되지 않도록 흰색, 주황색, 녹색의 강렬한 불빛으로 명시해 준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삶의 항로를 밝혀주는 등대가 필요하다. 때로 현상의 미로에 갇혀 갈피를 잡지 못할 때, 본질에 이르는 출구로 안내하는 불빛이….

울림을 주는 시와 공명을 일으키는 문장들, 영혼을 움직이는 음악과 그림들을 찾아 내 등화의 심지를 돋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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