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에서 돌아온 남편이 아파트 관리실에 알려야겠다며 전화부터 했다. 곁에서 들으니 '에어컨이 고장 난 승강기 안의 게시판을 한 번 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의아해하는 내게 들려주는 남편의 얘기에 터져 나오는 폭소를 참을 수 없었다. 한바탕 웃음이 무채색의 공간을 밝은 빛으로 채웠다. 곡선으로 날아가 과녁에 명중한 언어유희가 유쾌했다. 덕분에 웃음꽃이 곁들여진 저녁 식탁이 풍요로웠다.
올여름 더위는 가히 기록적이라 할만했다. 9월 중순이 지나도록 불볕더위가 뭉그적거렸다. 연일 기세등등한 폭염 때문에 냉방 장치를 사용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문명의 이기에 길든 육신은 폭서에 무력했다. 현관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온몸의 땀샘이 열리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한쪽 승강기의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후덥지근한 공기가 금세 온몸을 휘감았다. 35층을 오르내리는 2~3분이 길게 느껴지곤 했다. 며칠 뒤 승강기 안의 게시판에 '에어컨 수리 중'이라는 안내문이 한 장 끼워졌다. 외출할 때면 '이젠 정상 가동을 하겠지' 하는 기대로 탔다가 이내 손부채를 부치기 일쑤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웃들을 만나면 '오래도록 에어컨 수리가 안 되는 걸 보니 AS 신청이 밀려 있나 보다.'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시원한 냉기가 나오는 날을 기다렸다. 그렇게 한동안 에어컨은 제구실을 못했고, 게시판의 안내문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안내문 여백에 누군가 촌철살인에 가까운 한마디를 써놓은 것이다.
'여름 다 끝나야 고치겄슈!'
이렇듯 유쾌하게 나무랄 수 있다니, 아프지 않게 때린 회초리 같았다. 막혔던 배수구가 뚫린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었다. 주민들의 불편한 마음을 재치 있게 대변한 조크가 통쾌했다. 단순명료하게 정곡을 찌른 문장에서 마음의 여유가 느껴졌다. 누군지 분명 온유한 성품을 지닌 이웃이리라. 그의 해학적 위트에 찬사를 보냈다.
언어에도 선線이 있다. 직선처럼 곧고 강한 어감의 직설화법이 있는가 하면, 곡선으로 부드럽게 흘러 감성을 흔드는 간접화법이 있다. 거두절미한 필설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마음을 헤아리는 사려 깊은 언사가 효과적일 때가 있다. 배려가 담긴 말은 물처럼 부드럽게 곡선으로 흘러 마음을 파고든다. 유연한 곡선의 언어는 바위를 돌아 흐르는 계곡물처럼 여유롭게 목적지에 이른다.
능수능란한 언변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다. 말솜씨가 부족한 나는 유창한 화술보다 말맛이 부드러운 사람이 좋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말이 마음을 끌어당긴다. 곡선처럼 유연한 언어에는 사유의 공간이 있다. 그 행간에 담긴 의미를 음미하는 시간 속에서 인정의 기미를 읽을 수 있다.
웃음의 여운 사이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밝은 소성笑聲이 먼저 새어 나왔다. 관리실 직원들이 승강기 게시판에서 예의 글을 확인한 모양이다. 대화를 주고받는 기류의 흐름이 편안했다.
웃음에 씻긴 마음자리가 상쾌했다. 이름 모를 이웃이 남긴 한 마디가 웃음꽃 바람을 불러왔다. 시원한 미풍에 해거름 녘이 더없이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