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쉼표를 찍으며

2024.07.14 14:23:12

고미화

무심수필문학회 사무국장

계획에 없던 김치를 담그게 됐다. 녹색 채소에 소금을 뿌려두고 마트로 향한다. 밀린 숙제를 제쳐 두고 나서는 초저녁, 살갑게 안기는 미풍이 분주한 마음을 어루만진다. 두서없는 단어로 엉킨 머리가 한눈을 판다. 유예된 여유로움이 잠시 다가온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저녁 식사도 할 겸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하자는 남편의 제안에 따라나섰다. 어쭙잖은 글을 쓰면서 한동안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홀히 여긴 것 같아 미안했다.

녹음이 한창인 대청호 주변을 걸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서인지 호수 둘레길이 한산했다. 문의에 들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먼저 나온 남편이 어느 할머니와 흥정하고 있었다. 음식점 앞에 펼쳐놓은 좌판에는 얼갈이배추 2단과 열무 1단이 전부이다.

"할머니, 이것만 팔면 바로 집에 들어가시지요?"

"내가 몇천 원 벌자고 나온 것이 아녀. 우리 자식들이 못 하게 하는데, 농약도 안 친 채소라 아까워서 몰래 나왔지."

석양을 등진 노파의 모습이 흙 내음 가득한 밭을 보는 듯했다. 왜소한 체구의 갈색 낯빛에서 푸성귀보다 푸른 자존감이 뿜어져 나왔다.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참말인 듯했다. 여린 잎사귀에 애벌레가 남긴 흔적이 많이 보였다. 싱싱한 배추와 달리, 한 단 남은 열무는 흙에서 뽑힌 시간이 제법 지난 듯했다. 물에 젖은 잎이 축축했다. 스며들지 못한 수분이 열기로 인해 물러지고 있었다. 내가 망설일 겨를도 없이 남편이 값을 치르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어차피 사 드릴 거 같아서…."

전에 없던 남편의 모습에 살짝 당황했다. 마치 칭찬을 기대하며 청소를 도와주려다 더 어질러 놓은 아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유사한 상황에서 그동안 내가 취한 행동을 대신 한 것이라니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김치를 담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김치가 없는 것도 아니라, 발등의 불을 먼저 끄자는 심정으로 척박한 문장의 숲을 파헤치는 요즈음이다. 부족한 필력으로 글을 쓰느라 밀린 원고가 많다. 농번기를 맞은 농부처럼 마음은 바쁜데, 진도는 거북이걸음이다. 마감일 안에 퇴고를 마쳐야 하는 글 몇 편에 매달리느라, 주부 역할에 다소 소홀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재료들을 다듬어 씻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분주하다. 버려야 할 것과 남겨야 할 문장들이 자리바꿈을 계속한다. 불현듯 떠오른 단어가 사라질까 두려워 얼른 노트에 가두어 놓고 일손을 이어간다.

배를 깎아서 마늘과 생강과 함께 분쇄기에 갈았다. 씻어 놓은 재료들을 썰어서 물기 빠진 열무 위에 얹었다. 식혀둔 풀과 매실청까지 넣고 조심스럽게 버무린다. 적당한 풋내가 주방으로 퍼진다. 알싸하고 풋풋한 향내가 생기롭다. 한입 간을 본다. 아삭한 식감이 입안에 맴돈다. 상큼한 내음에 머릿속까지 개운해진다. 2~3일 숙성을 거친 뒤의 새큼한 맛을 가늠해 본다. 성큼 다가온 무더위에 식욕이 떨어진 깔끄러운 입맛을 더욱 시원하게 달래 줄 것 같다. 김치를 담그는 이 푸릇푸릇한 시간이 내 안에 쉼표를 찍고 있음을 문득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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