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자락 북동쪽에 매달린 가을빛이 매혹적이다. 절정을 막 벗어난 불꽃 같은 단풍이 너른 바위를 품고 있다. 물을 품고 구름이 발을 치는 집이라는 '소수운련암'의 각자가 남아 있는 바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자, 곧 우측에 자리한 사랑채와 별채에 이른다. 고종 황제의 행궁으로 쓰였던 별서別墅이다.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았다. '창의문(자하문)' 쪽 한양도성 성곽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펼쳐진 비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과연 탐할만한 경관이다. 리플릿에 실린 내용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본래 이곳은 조선 후기 문신 김흥근 소유의 별서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욕심을 냈다고 한다. 자신에게 팔 것을 여러 차례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아들 고종임금을 종용해 하룻밤을 지내게 한 뒤 목적을 달성했다. 왕이 묵었던 곳에 신하가 살 수 없다 하여, 고종의 임시거처가 되고 대원군의 예술활동 공간이 된 것이다.
'석파정'은 '유수성중관풍루流水聲中觀楓樓(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라는 뜻을 가진 정자이지만, 임금이 머물렀던 별채를 비롯한 정원 전체를 칭하는 듯했다.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던 선조들의 궤적을 떠올리며 고혹적인 뜰을 거닐었다. 후대의 다양한 평가 속에 존재하는 선인들에게 이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아름다운 자연과의 교감에서 인간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미술관 입구에서 들었던 안내원의 권유대로 정원을 먼저 둘러본 후, 실내 전시실로 들어섰다. 추사 김정희의 미려한 서체가 먼저 시선을 끈다. '주림묵묘삼당자珠林墨妙三唐字, 석실문고양한풍石室文高兩漢風'이란 애서문哀逝文의 족자가 화폭처럼 걸려 있다. 이번 전시회 특징은 작가들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작품이 전시된다는 점이다. 신사임당, 이중섭, 김기창, 천경자, 김환기 등, 한국미술사에 선명한 족적을 남긴 거장들의 작품에 한참 빠져들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시리즈에서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맛본다. 5세기 전의 붓끝에서 빚어진 작품이 겹겹의 시간 층을 뚫고 시선을 사로잡았다. 퇴색한 그림에서도 부드럽고 섬세한 묘사와 채색이 시대를 아우르는 느낌이다.
전시실을 거의 돌아볼 무렵 한 대형 작품이 걸음을 멈춰 세운다. 단순한 듯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다. 그림 속 파장에서 메시지를 읽는다. 흰색과 파란색, 흰색과 주황색을 띤 두 개의 원기둥이 하나가 되어 세워진 그림이다. 같은 색과 다른 색채를 동시에 지닌 기둥이 맞닿은 중심부의 음영이 짙다. 닮은 면도 다른 면도 있는 우리의 형상을 보는 듯하다. 사랑의 언어를 주고받는 연인들이 연상 되는 작품의 제목을 확인했다. 이우환 화백의 '대화(dialogue)'이다.
저렇듯 농밀한 대화로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친밀한 대화가 필요한 사이가 비단 연인들뿐만은 아닐 것이다. 며칠 사이 더욱 혼란한 정국을 보면서 흉허물없는 대화의 필요성을 생각해 본다. 이해타산보다 앞서 원활한 소통이 있었다면….
인정과 온기가 필요한 계절, 사소하고 본질적인 것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