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모습은 언제나 그랬다.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완전무장을 한다. 아니 어쩌면 천천히 세심하게 본다면 알아 챌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동안 보아왔고 알아왔던 것이었기에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지식을 동원해 그것을 명명한다. '맷돌'이라고.
K선생과 나는 그것이 '맷돌'이라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앞에서 이것은 맷돌의 아래짝이라고, 어디로 없어져 버린 위짝의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흉내를 내며 사진도 찍었다. 그러고는 맷돌이 크니 곡식도 참 많이 갈았겠다는 말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스님들의 음식을 담당했을 '맷돌'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넓은 들판은 영화로웠던 옛 사찰의 모습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곳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보원사지, 천년 고찰의 위용을 자랑한다. 삼국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이 되는 이 사찰은 한때는 승려가 천명이 넘었다고 할 만큼 웅장했다. 사찰은 사라져버렸지만 그 흔적들은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스님들의 물그릇 역할을 했던 한국최대의 석조와, 불기나 불화를 걸었던 당간지주, 백제시대부터 고려의 양식이 담겨있는 오층석탑, 법인 국사가 입적하자 고려 광종왕의 지시로 세워 졌다는 법인국사보승탑, 그 외에도 대사찰의 유물들과 초석들이 넓은 들판에 듬성듬성 남아 있고 무엇보다 절터 한 옆에 모아 놓은 기와와 석재들은 그 시대의 건축양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어 역사학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도 짐작이 되었다.
K선생과 보원사지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도중 우리는 각자 유물 한 점씩을 마음에 담았다. K선생은 5층 석탑에 새겨진 팔부중상 중 건달파 상을 나는 금당지에 있던 초석이었다. 금당지는 절의 본당으로 본존상을 모시던 전각의 자리이다. 그곳을 당당히 지키고 있는 초석을 보며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불에 타고 오랜 세월 풍파를 겪으며 전각의 모습도 모두 사라졌지만 이곳이 본당이라며 굳건히 지키고 있는 초석 앞에서 나는 왠지 모를 먹먹함에 한참을 그 앞에서 떠날 수 없었다. 모든 게 변하고 사라진다 해도 반드시 그 자리를 지키겠다는 충신처럼 금당지의 초석은 의연함마저 느껴졌다.
초석은 자고로 건물의 씨앗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초석을 바탕으로 그 다음 건물의 모습이 배열이 되고 높아졌을 것이다. 때문에 건물은 없어져도 남아있는 초석의 배열상태, 초석간의 거리 등으로 당시 건물의 모양을 추정할 수 있다. 그로인해 건물을 복원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시작 할 때면 초석의 중요성을 염두에 둔다. 보원사를 지을 때도 그러했으리라. 금당지의 초석은 보원사의 시원이 되어 모든 건물이 계획되고 태어나 완성이 되는 모든 모습을 지켜봤을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불에 타고 자연의 거대한 힘에 쓸려 사라질 때도 그 아픔과 고통도 모두 끌어안고 인내했으리라. 그러니 저리도 당당하고 의연할 수밖에….
보원사지 당간지주를 지나 나오는 길에 다시 뒤돌아보니 K선생과 '맷돌'이라 불렀던 유물이 저 멀리서 오뚝하니 보였다. 마치 우리가 안 보일 때까지 까치발을 하고 배웅을 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조금 전에 들렀던 곳이 자꾸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오는 길에 절 한옆에 모아 놓은 석재를 둘러보았다. 그곳엔 우리가 '맷돌'이라 부르던 것들이 더러 있었다. 맷돌의 위짝 같기도 하고, 아래짝 같기도 한 것이 말이다. 그런데 옆 게시판 설명을 보아도 그 중에 맷돌이 있다는 소리는 없고, 석재와 초석이 있다는 말만 보였다. 결국, 나는 그 석물을 떼어내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화두가 된 그것을 지금도 중얼거리는 중이다. 정녕, 그것이 맷돌일까? 아니면 초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