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내려앉는 집

2024.12.12 15:24:03

김경순

교통대 커뮤니티센터 글쓰기 강사

어둠이 내려앉은 산골을 달린다. 노을은 서쪽 하늘 끝에 꼬리를 내리는 참이다. 노을이 끝나는 지점, 그곳이 목적지다. 오 년쯤 되었을까. 언니는 노을이 끝나는 산 밑에 집을 지었다. 십년 전부터 한쪽 다리는 서울에 나머지는 시골에 걸치고 오르내렸다. 그곳에 번듯한 집을 지은 지금도 여전히 그 생활은 여전하다. 농막 살이 때와 달라진 게 있다면 서울 큰 살림살이는 죄다 들어 앉혔다는 점이다.

언니와는 한 어버이 밑에서 나고 자랐지만 성격, 외모, 성향 중 교차점이 어디에도 없다. 언니는 나와 8살 차이로 형제 중 맏이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신지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장형부모라는 말이 있다. 맏이는 어버이와 같다는 말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만 해도 그 뜻을 헤아리지도 마음에 와 닿지도 않았다. 헌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우리 형제들은 맏이인 언니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서울서 직장을 다니면서도 언니는 주말이면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 처음에는 텃밭 수준이었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부터 곡식의 가짓수는 물론이고 면적도 넓혀 갔다. 언니는 가을걷이가 끝나면 자식은 물론 우리 형제들에도 곡식을 나눠 주었다.

오늘도 언니가 호출을 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모양이다. 수업이 다 저녁이 돼서야 끝났다. 언니네 집은 읍내에서 차로 삼십분 남짓 거리의 산 너머 은행나무골이라는 동네다. 돌고개를 올라서니 저 아래 밤나무재가 내려다보인다. 어느덧 해는 서쪽 산 위에 걸쳐 붉은 빛으로 주변을 발갛게 물들이는 중이다. 해가 짧아서일까. 아니면 가을걷이가 끝나서일까. 농부들은 물론이고, 경운기도 오가는 차들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들도 산도 비어가는 중이다. 복숭아나무는 노란 빈 봉지만이 바람에 살랑이고, 산길을 지키는 참나무는 바싹 마른 잎들을 바람에 그네를 태우는 중이다. 작고 둥글거나 길쭉하기도 하고, 크고 넓적한 잎들이 길 위를 점령했다. 여름철 개구리 떼 같다.

언니네 집에 도착하자 해는 이미 노을과 함께 산속으로 숨어들어 세상이 온통 암흑이다. 대신 야광 불빛이 마당을 은은하게 밝힌다. 언니가 끓여준 구수한 청국장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언니가 그러고 보니 엄마를 닮았다.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세월보다 무서운 게 어디 있을까. 차마 언니를 똑바로 마주 할 수 없어 나도 모르게 다른 곳을 보거나 엉뚱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빛을 모두 집어 삼킨 바다 밑처럼 세상이 적요하다. 자동차 불빛이 길을 만들며 쓸쓸한 초겨울 길을 달린다. 뒷좌석 커다란 까만 봉지가 듬직하다. 김장고추가루 두 봉지, 배추와 무가 각각 한 봉지, 대파는 비료 포대에 넣었다. 매큼하고 매캐한 냄새가 차 안을 가득 메웠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하다. 언니는 올해 고추가 유난히 맵다고 했다. 눈물이 난다. 그래, 그래서 일거야. 엄마 생각이 나서도, 언니의 주름진 얼굴 때문도 아닐 거라고 혼자 웅얼웅얼했다.

이상하게도 김장때면 돌아가신 엄마 생각에 마음이 헛헛하다. 언니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엄마가 하던 일을 저리 하는 것일 게다. 동생들을 불러 모아 밥을 해 먹이고, 농작물을 나눠주는 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이미 엄마다. 어쩌면 언니가 그곳에 터를 잡은 것도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을이 내려앉는 집, 그 집에는 엄마를 닮은 우리들의 아름다운 언니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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