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은 설렘이다. 그럼에도 만남처럼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지는 것도 없다. 그러니 준비도 연습도 없는 것이 만남이다. 그렇게 만남은 시작이 된다. 어찌 보면 이보다 허무한 것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시작은 부담이 없이 해볼 만한 일이다. 때로는 쑥스럽고 어리숙하기도 하더라고 흠이 되지는 않는다.
아이가 처음으로 학교를 가고 친구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가슴 설레겠는가. 물론 새로운 세계로 진입을 하는 일이니 불안하기도 하고 초조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몸을 키우는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이다. 작은 사회였던 유치원과 초·중·고에서 사람과의 관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을 수많은 감정들과 대처법을 배우게 되는 소중한 과정 중 하나다. 미움, 실망, 사랑, 우정, 용기, 성과, 성취감 등과 같은 순간들을 통해 성인이 된 후를 대비할 수 있다. 물론 그 작은 사회에서도 극단의 일들이 벌어져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지만 대부분은 그곳에서의 경험이 사회로 내딛는 발걸음의 초석이 된다.
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쇄설이 아니다. 우리 집은 장애묘를 집안에서 키운다. 5년 전, 낳은 지 한 달도 채 안된 새끼를 어미가 우리집 발코니에 버리고 갔다. 새끼 고양이는 머리와 눈이 온통 고름투성이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어미는 살지 못할 거라 생각되어 그리 했을 터였다. 그날 새끼 고양이는 동물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줄곧 지금까지 우리가 키우는 중이다. 겨우 걸음마를 뗄 때부터 우리와 살았으니 진정한 고양이 세계는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사람과의 관계가 좋은 것도 아니다.
처음 사람을 알게 된 것이 동물 병원이었으니 좋은 기억이 심어졌을 리 만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끼고양이의 병구완을 나와 작은 딸이 해 주어서인지 우리 둘에게만 경계하지 않는다. '먹구', 이름도 지어 주었다. 수술을 받았지만 먹구는 한쪽 눈과 청력을 상실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것이 두려운 건 당연하다. 지난여름이었다. 청소하느라 열어 놓은 거실 창문을 통해 먹구가 발코니로 나간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기거하던 고양이들과 대면을 하게 되었다. 딴에는 같은 고양이니 서로 냄새도 맡고 반가워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먹구는 온 몸의 털을 세우고 소리를 질러댔다. 반면 다른 고양이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눈만 꿈벅꿈벅 발코니 그늘에 누워 꿈적도 않고 먹구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미 길고양이들은 먹구의 모습을 몇 년 동안 창을 통해 봐 왔으니 어느 정도 간파한 게 분명했다. 고양이들의 세계를 알 턱이 없는 먹구와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역싸움이 치열한 길고양이의 삶은 천양지차일 수밖에 없다. 관계의 경험이 그리도 중요한 일인지 새삼 알게 된 날이었다.
덩치는 바깥 고양이들보다 큼에도 생각도 지능도 어리기만 한 먹구지만 우리에겐 사랑스러운 가족이다. 한참을 멍하니 바깥을 응시하는 중이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는 것일까. 아니면 흰 눈이 쌓인 앞집 텃밭이 궁금한 것일까. 그도 아니면 어쩌다 지나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싶은 것일까. 오늘도 외짝이 먹구는 고독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