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택

충북도교육문화원 문화기획과장

벌써 십수 년째 이발을 위해 단골로 찾는 동네 작은 이발관이 있다. 흔히 말하는 노포다. 야트막한 추녀 아래 붉은색과 파란색 흰색 띠가 어우러진 회전 간판이 빙글빙글 소리 없이 돌아간다는 건 변함없이 영업 중이라는 뜻이다. 노포 안으로 들어서면 빛바랜 도구들과 벽면 가득 큼지막한 거울이 인상적이다. 이발사의 손놀림이 지날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잔해를 거울을 통해 살피는 건 또 다른 재미다. 오로지 빗과 가위만 들고 어쩌면 그리도 내가 원하는 머리 모양을 만들어 내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분명 가위가 잠시 잠깐 왔다갔다 했을 뿐인데, 이내 2:8 가르마가 제일 잘 어울리는 깔끔한 머리 모양이 탄생한다.

머리 모양을 다 다듬고 나면 얼굴 전체 면도를 시작한다. 이 또한 예전 그대로라서 좋다. 뭉툭한 솔에 부푼 솜사탕처럼 비누 거품을 묻히고 연탄난로 옆구리에 문질러 따뜻해진 거품을 내 턱과 인중, 얼굴 전체에 골고루 펴 바른다. 그리고는 뜨거운 물수건으로 덮어두기를 한참, 이발사의 손에 들린 면도날이 따뜻하게 달아오른 턱과 얼굴을 조심스레 그러나 신속하게 바람을 가르듯 현란하게 움직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그런데도 난 이발하는 과정 중에서 안면도를 하는 시간이 제일 좋다. 정겹고 설렌다. 샤샥 하는 소리를 내며 잘려 나간 까칠한 수염이 거품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나면 이보다 더 시원할 수가 없다. 최고의 상쾌함이다. 이 맛에 나는 꼭 이발소를 찾는다. 그것도 한 달에 한 번씩 말이다. 빼먹지 않는 월례 행사지만 노이발사의 손길을 받으러 가는 날은 이상하리만치 설렌다. 내게 이런 설렘이 없었다면 진작에 현대적 감각의 헤어숍(Hair shop)을 찾았을 게다. 이발을 하기 위해 노포 이발관을 찾는 설렘 못지않게 매년 새 학년도에 아이들을 만나는 설렘은 격정적이고 강렬하다. 놀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의 웃음 가득한 해맑은 모습이 하나씩 그려지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아이들과 함께 만들고 가꿔갈 교실 풍경이 끊이지 않고 돌아가는 영사기의 필름처럼 머리와 가슴 한가득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는 흔히 말하는 '기대감'과는 다른 설렘이다. 설렘이 절정에 달하는 사이 꿈속에서조차 아이들을 만나 행복에 젖으며 그렇게 또 새로운 걸음을 시작한다. 그래서 해마다 새롭다. 이토록 강렬한 설렘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그런 선생에 불과했으리라. 처음 교단에 발을 디딜 때나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건 바로 내 안에 마르지 않고 샘솟는 설렘 덕분이다. 선생으로 살아오면서 한 번이라도 설렘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선생으로서의 길을 접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어느 순간 설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믿고 살아온 까닭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과 직업 앞에서 그저 생계유지 또는 지위와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거나 그 안에 설렘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좋다. 과감히 용기를 내야 한다. 단순히 부와 권력만을 좇는 길이라면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말고 멈춰야 한다. 역할의 중요성은 뒤로한 채 지위만을 탐하는 길이라면 더더욱 당장 멈춰야 한다. 권력과 부와 지위라는 것이 물거품과 같아서 가지고 있을 때는 큰 산처럼 보이지만 떨어지고 나면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한낮 먼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설렘은 진정으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존재가치를 곧추 세울 수 있는 마르지 않는 샘이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들여다보라. 그리고 얼마만큼 자신의 일에 설렘이 있는지 따져보라. 만약 조금이라도 설렘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과감히 용기를 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부와 지위를 좇아간다면 그건 스스로 자신을 잃는 행위요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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