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아그리빠 석고상을 앞에 두고 데생을 하는 수업이 있었다. 미술에 대한 능력이 부족했던 터라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교수님의 설명에 따라 연필로 아그리빠의 가로 세로 비율을 재가며 정말 열심히 그렸더랬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도화지 위에는 조금씩 아그리빠의 형체가 생겨났고 오똑한 코와 깊은 눈 등 입체감이 살아나며 제법 아그리빠다운 모습이 완성되어갔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평가를 받던 날 교수님은 내가 그린 아그리빠를 보시며 "어쩌면 자네와 아주 똑같이 닮았구만" 하셨다. 내 나름대로 아그리빠 석고상의 특징을 살리려 최선을 다했건만 내가 그린 아그리빠에서 아그리빠 본연의 모습이 아닌 내 모습이 보였다니 분명 그 안에 내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난해 12월의 어느 날 한 첼리스트의 연주를 바로 코앞에서 감상하는 행운을 맞은 적이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를 관람할 때는 먼 객석에서 음악을 듣느라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처음으로 불과 3m여의 거리를 두고 첼리스트와 마주했는데, 음악 소리보다 더 감동이 되고 심장이 뛰는 일이 있었으니 바로 첼리스트의 호흡이었다. 음악의 강약과 리듬, 템포와 음색에 따라 첼리스트의 호흡은 그야말로 파도가 치듯 음악과 한 몸이 되어 때론 거칠게 또 때론 부드럽게 내 귀와 심장을 넘나들었다. 첼리스트의 호흡은 현란한 손가락의 움직임과 함께 나로 하여금 그 속에 푹 빠져들게 했다. 나는 첼리스트의 호흡을 통해서 연주자와 하나가 되었고, 첼리스트의 세계에 흠뻑 빠졌던 진한 감동의 잔상은 지금까지도 내 심장의 설레임과 요동으로 남아있다.
배움의 기회, 배울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배워서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나의 것이 되어가는 과정에는 끊임없는 성찰과 열정을 필요로 한다. 지금의 것에 안주하거나 자신의 것만 고집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타인의 것을 배우고 타인의 비판을 겸허히 수렴하여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야 온전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3인행이면 필유아사언"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 곱씹고 새겨야 할 덕목이다.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타인으로 인해 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면 그 때에야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는 진정한 나, 즉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타인의 감정선, 표정, 시선, 언어, 제스쳐 등을 통해서 말이다. 왜냐하면 타인은 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은 곧 나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즉 나는 너를 통해서 너는 나를 통해서 온전히 자신을 알아채고 자신만의 삶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인이 나의 거울이듯 나는 타인의 거울인 까닭이다.
내 생각이나 판단, 결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내가 내린 결정이 객관적이지 않거나 상식선에서 타인의 이해를 이끌어내지 못할 때 이를 두고 우리는 독선이라 부른다. 아집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독불장군'은 경계해야 하는 태도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주위에 내 생각을 들어 주고 균형 잡힌 판단을 해 주는 이가 있어야 하고, 나에게 충고와 직언을 해 줄 이도 있어야 비로소 장군이 될 수 있다. 만약 따르는 이도 거느리는 이도 없는 장군이라면 어찌 온전한 장군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단언컨데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제대로 설 수 없다. 혼자 서려고 하면 할수록 독선과 오류의 폭은 커지기 마련이다. 나와 타인이 서로를 통해 배우고 닮아가며 삶을 가꿔갈 때 제대로 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가 서로의 거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