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금이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의 침묵은 결코 '금'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다.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에 대해 아무 말 없이 침묵하거나 소통하지 않는다면 위험은 더 깊어진다. 무관심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극단적 폭염, 대형 산불, 가뭄과 홍수, 해수면 상승과 생물다양성 파괴까지 곳곳에서 기후위기의 경고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조용한 느낌이다. 이 조용함이 이런 심각성을 모른 채 회피하는 침묵이라면 더욱 위험하다. 침묵과 무관심으로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계속되는 지구의 경고를 외면하기보다는 이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 훨씬 유리하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기후 담론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오가는 작지만 지속적인 의사소통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지금 기후에 대해 자꾸 수다를 떨어야 할 때다. 이른바 '기후 수다'이다. '수다'의 사전적 의미는 "쓸 데 없이 말수가 많음"으로 다소 부정적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격의없고 자유로운 대화, 친근한 소통방식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격식을 갖춘 토론도 중요하지만 기후위기와 탄소중립에 대해서는 더 쉽고 편하게 떠드는 방식이 필요하다. 카페에서, 식탁 위에서, 단체 채팅방에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기후 수다는 실천의 가능성을 넓히는 출발점이 된다. 유발 하라리도 『사피엔스』에서 수다의 중요성을 언급한 바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종을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핵심 전략 중 하나는 바로 수다였다. 누가 믿을 만한지, 누가 위험한지를 이야기하며 공동체는 정보를 축적했고, 협력의 틀을 만들었다. 언어의 진화 역시 소문과 이야기, 수다에서 비롯되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을 위해 택했던 수다 전략을 이제는 기후위기 시대에 다시 꺼내야 할 때가 되었다. 기후 수다를 떠는 것이다. "전기요금은 지금 적절한 수준인가?", "탄소중립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환경권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왜 나는 자꾸 플라스틱을 쓰게 되는가?" 등 수다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또한 이런 질문들은 단지 정책의 영역 뿐만 아니라 평소 우리의 생활하는 사소한 고민까지 포함되면 좋다. 격식있는 학술 토론회에서 전문가들에게 기후위기의 문제를 듣는 것도 필요하지만, 버스 정류장이나 동네 커뮤니티에서, 각 가정 식탁 위에서 편하게 말 할 수 있는 일상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기후 수다는 정보의 공유를 넘어, 실천의 동력이 된다. 누가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하는지, 누가 에너지를 절약해 아파트 관리비를 낮추었는지, 누가 일회용품을 줄이기 위해 어떤 시도를 했는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환경교육센터는 있는지 등등 내 생활 주변의 기후 이야기가 자랑이 되고 칭찬받으면서 퍼져나가야 한다. 문제는 기후위기나 탄소중립이 결코 '재미난' 대화 주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렵고 불편한 이야기라 사람들은 피하려 한다. "알긴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반응이 돌아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다수의 수다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말하고, 두 사람이 공감하면서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침묵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이제 기후 수다의 광장을 넓혀보자. 밥상머리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기후 수다는 자연스러운 환경교육이 될 수 있다. 여기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수다에 합세한다면 금상첨화이다. 기후 수다로 세대간 갈등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시대, 말이 곧 실천이고, 다수의 수다가 곧 생존이다. 이제 다같이 기후수다를 떨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