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우의 그림 이야기 - 21세기 진경산수화가 왕철수

2025.06.09 16:44:06

왕철수 작가 도담삼봉 작품.

ⓒ이동우
조선 시대에는 도화서(圖畵署)라는 기관이 있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화원들은 임금님의 초상화(어진)와 궁궐도, 임금과 관련된 궁중 행사들을 사진 찍듯이 그리는 일이 주 업무였다. 여기에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고 해서 우리나라 산수를 사실적으로 그리기도 했다. 김홍도(1745~1806)가 그린 단양지역 산수화와 금강사군첩, 도화서 화원은 아니었지만 정선(1676~1759)이 그린 인왕제색도, 금강전도 등이 유명하다. 그 당시는 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니 현장을 실제로 가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정선의 인왕산 수성동 계곡 그림은 아파트를 철거하며 계곡을 옛 모습대로 복원하는데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첨단 영상장비와 카메라가 생생하게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시절에, 옛 화원들처럼 우리 풍경을 우직하고 진솔하게 자기만의 조형 언어로 담은 화가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왕철수(1934~2004)이다.

왕철수 작가 마지막 장날 작품.

ⓒ이동우
왕 작가와 필자는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고, 전시회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쳤을 뿐이다. 최근 충북미협에서 추진하고 있는 '충북미술 50년사' 발간사업에서 '증평미술'을 맡아 쓰며 그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다.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일화는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는 그림이 좋아서 매달린 탁월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충북의 자연과 사라져 가는 고향을 살려낸 작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부에서는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에 안 좋은 소리도 있었지만, "그림이 좋아서 그릴뿐이며, 그림에 대한 관점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리 연연해하지 않는다"고 초연했다. 왕 작가는 증평에서 태어나 대전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세부터 교사생활을 시작해 46년 동안 충북지역에서 미술 교사 겸 작가로 살아왔다. 그림을 좋아하던 소년 왕철수는 그림 그리기에 매달린다. 환쟁이라고 화가를 천한 직업으로 여겼던 그 시대에, 장남이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부친에 의해 그림 도구가 마당에 내동댕이쳐지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버드나무 가지를 구워 목탄을 만들고, 쓰다 남은 도배지에 석고 데생을 하며 미술에 대한 열정을 키워나간다.

대전사범학교에서 미술을 본격적으로 배웠는데,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 교육과정 중 하나로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초등교사에서 교원 검정시험을 통해 중등 미술교사가 된 이후, 그림을 더 배우기 위해서 서울을 오르내리며 김서봉(한국미협이사장 역임), 김호걸 등의 화가들에게 그림을 배운다. 그러자 "체면도 없이 아무 곳이나 가서 그림을 배워 지역 미술인의 위신을 떨어뜨린다"고 뒷담화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왕 작가는 "배움에 나이와 체면이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소신으로 늦깎이 화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그의 제자인 K선생은 회상하고 있다.

왕철수 작가 무심천 작품.

ⓒ이동우
청주 C여고에 근무할 때는 교감 선생님이 승진 관련 서류를 올려 '교감 자격 연수'가 나오자, 왕교사는 노발대발하며 학교 관리자보다는 학생들을 만나고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평교사로 남겠다며, 교사라면 많이들 받고 싶어하는 '교감 자격 연수'를 취소했다고 한다. 미대 입시 준비를 하는 3학년 학생들이 다니는 학원들을 아이스크림을 사서 방문하며 학생들을 격려하는 등 학생들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다. 대부분이 제자인 학원장에게 C여고 학생들을 신경 써 지도해 달라고 무언의 압력을 가했다는 일화를 같이 근무한 L선생에게 들었다.

왕 작가는 풍경화는 "발로 그리고 경험으로 그린다"는 평소 말처럼 고향산천을 그리기 위해 내리쬐는 뙤약볕을 마다하지 않으며, 눈보라 휘몰아치는 세찬 겨울바람을 무릅쓰고 그림 그릴 곳을 찾아 며칠씩 지냈다. 언젠가는 가족들 몰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벽지를 근무지로 지원하기도 한다. 충주댐 수몰 지역을 돌며 물속에 가라앉기 직전의 풍경을 화폭에 기록했고, 고향인 증평, 괴산 지역의 풍광과 대청호반의 사계를 담아 풍경화 전시회를 연다.

왕 작가의 그림은 고향을 잃은 사람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되살려 위안을 주었음은 물론이고, 충북지역을 붓끝으로 담은 기록화로서, 사진과는 다른 커다란 의미가 있다.

최근 들리는 말에 의하면, 왕 작가의 많은 작품들은 보관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는데, '증평군립미술관'을 건립해 그의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보관되고 전시됐으면 한다. 좀 더 여유가 있다면 같은 증평 출신의 또 다른 한국화가 임송희(1938~ , 덕성여대 명예교수)작가의 공간도 마련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면 타 미술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동·서양의 산수화와 풍경화를 비교 감상할 수 있는 차별화된 전시 공간이 될 것이다. 왕 작가의 따님과 사위는 필자가 다닌 대학미술과 선배들인데, 한동안 작품활동을 열심히 하다가 붓을 꺾은 것이 많이 아쉽다.

"그림 그리는 것이 재밌거든, 내가 생각한 대로 표현해낼 수 있으니까.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렸어. 그림이 아주 몸에 뱄지. 한 번도 그림을 놓은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럴꺼야" 라고 말한 왕 작가에게 그림은 삶 그 자체였다.

이동우

미술관장·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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