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북소리

2024.01.18 15:30:17

한기연

음성문인협회장

검푸른 바다 위 대장선에서 북채를 잡고 이순신 장군이 온 힘을 다해 북을 두드린다. 전장에서 북소리는 듣는 이의 심장 고동을 조율하게 되어 아군의 사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직접 북을 크게 치면서 전투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말라는 독려의 소리를 전한다. 갑자기 총소리가 울리고 북소리가 끊긴다. 총상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 이순신 장군은 "싸움이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결코, 이 전쟁을 이렇게 끝내서는…."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누군가가 다시 일어서며 북을 치기 시작한다. '둥둥둥 둥둥둥' 바다에 울려 퍼지는 북소리가 수면 아래로 침몰한다. 이순신 장군의 옷을 입은 첫째 아들이 울리는 통곡의 북소리가 가라앉는다.

짙은 어둠 속 검은 바다에서 전투가 시작되고 동이 틀 때까지 거대한 장송곡이 흐른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운구하면서 흐르는 상여가로 영화는 종결된다. '노량'에서 이순신 장군이 맞이한 최후의 순간도 먹먹했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난중일기에 보면 막내아들 면이 죽었다는 편지를 받고 "내가 죽고 너가 사는 것이 올바른 이치인데, 너가 죽고 내가 살다니"라고 통곡하며 "아직 목숨은 남아있지만,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있을 따름"이라며 울부짖었다.

영화가 끝나고도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를 듣는다. 그 북소리는 어젯밤 한 해를 보내던 '제야의 타종행사'로 나를 이끈다. 4년 만에 음성읍 설성 종각에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뜻깊은 마지막 밤에 시 낭송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 틈틈이 연습했다. 2박 3일 일정으로 가족여행을 강원도 낙산사 근처로 갔다가 늦은 밤 겹겹이 옷을 입고 종각으로 갔다. 자정을 20여 분 남기고 촛불을 손에 들고 소원을 비는 시간에 새해의 소망을 담은 시를 낭송했다. 마음속에 등 하나 밝히고 간절함으로 한 줄 한 줄 읽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의 바람을 시에 담았고, 희망을 전하는 메시지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일 년의 시간 중에서 12월은 아쉬움이 가장 큰 달이다. 지난 한 해를 힘들게 보낸 이도 있을 테고 무탈하게 보낸 이도 있을 터이다. 종각 앞에는 저마다의 소원지가 별빛에 닿기라도 할 것처럼 나부낀다. 소원지를 달면서 보니 자신을 위한 바람보다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기도가 많았다. 나 또한 낙산사에서도 그러하고 이곳에서도 가족의 행복을 먼저 빌었다. 낙산사의 영험함을 빌어 타지에서 생활하는 두 아들의 무사안일을 비는 초를 밝혀 두고 왔다.

이순신 장군이 전장의 흩어진 힘을 모으는 북소리가 지난 자정에 울리던 종소리로 들린다. 청룡의 기운이 없던 힘도 생기게 한다. 누구나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하루를 열심히 산다. 희로애락의 순간마다 곁을 지키는 소중한 가족도 있을 것이고, 인연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새해의 다짐과 계획이 사그라지면 '둥둥둥' 북소리가 마음속에 울려 퍼질 것이다. 이순신 장군처럼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치열하게 삶을 살겠다는 소리이다. 귓가에 선명히 울리는 북소리가 뜨거운 전율로 혈관을 타고 심장에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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