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호

2022.12.15 15:38:02

한기연

음성문인협회장

어젯밤 내린 눈이 얼어붙은 길 위에 비상등을 켜고 차가 서 있다. 다행히 내 차를 뺄 수 있는 공간은 있어서 다른 사람의 수신호를 받아 출발에 성공했다. 겨울철 사고를 몇 번 경험한 나로서는 무섭고 두려운 길이다. 그래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한 시간 일찍 서둘렀다.

수업 가는 길을 두려워하는 내게 '큰 도로는 제설작업이 되어 있을테니 걱정하지 말라'던 남편의 말이 옳았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속도를 줄이면서 운전을 했다. 이른 시간에 시작하는 수업이라 대상자가 과연 올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오늘은 아프간 특별기여자를 대상으로 한국문화에 대한 특강이 있는 날이다.

처음 특강 제의를 받았을 때 바로 수락한 후부터 걱정이 됐다. 주어진 세 시간 동안 과연 어떤 수업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법무부에서 시행하는 수업에서는 주로 한국 사회 이해영역으로 한국문화를 가르쳤다. 교재를 가르칠 때마다 공부하면서 스스로 '어렵다'라는 말을 되뇔 정도로 힘들었다. 법무부에서 제시된 문화영역의 범위에서 실제 필요한 부분을 몇 가지 정했다.

지난해 8월 말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390여 명이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 정권을 피해 한국에 왔다. 정착 지역은 울산이 159명으로 가장 많으며 경기 3천134명, 인천 85명, 충청 16명 순이다. 처음 한국에 와서 진천 국가공무원 인재개발원에 76가구 377명이 두 달간 임시로 생활했다. 그 당시 한국어 강사를 모집하는 문자를 받았었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되지 않았다. 이들은 충북 진천과 전남 여수 등에서 5개월간 직업훈련과 언어·문화 교육을 받고 올 초부터는 지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일곱 살 된 남자아이와 부부를 처음 만났다. 청주 오송에 사는 데 출입국직원분이 함께 오셨다. 수업대상은 네 명으로 대소에서 오는 두 명이 버스가 없어서 택시를 타고 40여 분 뒤에 왔다. 기다리는 동안 아이에게 종이접기를 가르쳤는데,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한국말도 곧잘 했다. 거리낌 없이 웃고 장난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국적이 없음을 새삼 느꼈다.

특강 주제로 직업 구하기와 집 구하는 방법을 선정하여 강의했다. 특히 직업에 대한 부분은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찾아서 알려 줬는데 가장 관심이 많은 부분이었다. 한국어가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본국에서 '의사'라는 전문직으로 일했지만, 한국에 와서는 직업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어서 그 방법을 물어봤다. 직업이 연계되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질문은 곤혹스럽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1년 전 한국에 온 아프간 특별기여자 중 대부분이 모국에서 쌓은 경력과 무관한 분야에 종사하는 탓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법무부에 따르면 아프간 시절 직업을 가졌던 특별기여자 79명 가운데 37명이 바그람 한국병원에서 일했다. 의료진 28명, 행정지원 업무 9명이다. 이어 주아프간 한국 대사관 21명, 바그람 한국 직업훈련원 14명, 우리 정부가 아프간 주민을 돕기 위해 운영한 지방재건팀(PRT) 6명,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1명 등이다. 대부분이 의료진, 교사 등 전문직이나 행정직으로 종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국내 연수원에서 퇴소한 직후인 지난 2월 기준으로 전문직에 취업한 이는 미국행 1명을 제외한 78명 중 단 한 명에 불과했다. 대부분이 제조업과 조선업에서 일하고 있다.

돌아가는 길에 무거운 짐 하나 얹은 기분이다. 세계는 하나라는 현실 앞에 다른 이들과 함께 공존하는 것은 과제이다.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수신호로 언어와 문화의 장벽도 무너뜨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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