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노인의 방문

2019.09.22 15:05:13

이태재

국민연금공단 청주지사 노후준비서비스 팀장

흥겨운 캐롤송이 울려 퍼지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친구들과 연말모임이 있어서 3차까지 하고 집으로 오는 길이였다. 아파트 입구에 지팡이를 짚은 웬 노인이 서성이는 게 보였다. '이 추운 밤에 왜 여기 나와계실까?'하는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술도 취한 터라 그냥 지나치는데 갑자기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저어, 혹시 이태재씨인가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저를 아세요?"라고 되물었다. "응 잘 알고 있지. 나하고 잠깐 얘기 좀 할까?" 이렇게 말하고, 노인은 내 대답은 들으려 하지도 않고 앞장서 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노인이었다. 그런데 왠지 낯설지만은 않다는 느낌도 들었다.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술도 좀 더 깨고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우린 아파트 앞에 있는 작은 카페로 들어갔다. 불빛 아래서 보니 노인은 이상한 디자인의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온통 주름투성이였으며, 셀 수도 있을 정도로 몇 개 안 남은 머리카락에 비쩍 마른 몸매를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불쌍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반가운 듯 얼굴엔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내가 '저녁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잔다'고 하자, 노인은 알고 있다고 하며 유자차를 두 잔 주문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재촉하듯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저를 어떻게 아시죠? 저는 처음 뵙는 분 같은데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 입에서는 술 냄새가 풀풀 나고 있었다. 노인은 대답 없이 그저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한동안 추억에 잠긴 듯한 눈빛을 하고 있던 노인은 유자차를 한 모금 길게 들이마시더니, 믿기지 않을 거라는 말과 함께 어려운 듯 말을 꺼냈다. 노인의 말은, 자신은 30년 뒤의 미래에서 온 바로 '나'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시간여행 기술이 개발되어서 딱 한 번 과거로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지금쯤의 나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헐, 어이가 없었다. 무슨 영화 속 얘기도 아니고, 믿을 수가 없어 '에이 설마' 하고 코웃음 치며 장난하지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 노인이 나의 과거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비밀스러운 일들까지 말이다. 아무리 용한 점장이라고 해도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맞히겠지만, 그 일을 겪은 때와 장소까지 그리고 그때의 내 심정까지 맞히진 못할 것이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고, 술이 확 깼다. '이 노인이 정말 나란 말인가?' 노인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보니, 정말 나의 늙은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나?

여전히 믿기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해서 노인의 말을 계속 들어 보기로 했다. 노인의 말의 요지는 이랬다. 지금의 내가 노후준비를 제대로 안 해서 30년 뒤의 자신이 너무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연금 그거 몇 푼 나오는 거 갖고 사는데 아내는 몸이 많이 아프고, 자식들은 자기들 살기에 바쁘다고 했다. 그러니 제발 지금 좀 덜 쓰고, 덜 즐기고, 미래의 자신을 위해 좀 더 남겨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애들 결혼시킬 때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나눠주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고 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제발 부탁한다고 사정사정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제발 술 좀 줄이고 운동도 좀 해가며, 건강관리 잘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나의 두 눈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이 늙고 초라한 노인이 나의 미래의 모습이라니, 그리고 그게 다 지금의 내 탓이라니, 한없이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한참을 울다가 문득 깨어 보니 꿈이었다. 그런데 꿈이라고만 하기엔 너무도 생생했다.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베개는 흠뻑 젖어 있었고, 진한 슬픔의 여운 속에 그날 밤은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후부터는 미래의 나와 대화하는 버릇이 생겼고, 무슨 중대한 결정을 해야 할 때는 꼭 '미나(미래의 나)'와 상의를 하곤 했다. "미나야! 너를 위해 연금도 더 들고 저축도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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