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고 사랑하면 알게 된다 하던가. 우연히 숲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무심히 바라보았던 풀, 꽃, 나무들 하나하나를 개성 있고 의미 있는 존재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채롭고 풍성한 세계가 거기 숨어 있었다니, 그동안 식물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부끄러워진다.
식물이 인간보다 훨씬 더 진화되고 똑똑하다 한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보았던 개울가에서 수북이 자라던 '고마리'는 시시한 풀로만 기억이 난다. 얼마 전 숲을 지나다 별사탕처럼 빨갛고 하얗게 핀 고마리 꽃 무리를 마주한 순간, 그 순수하고 영롱한 귀여움에 감탄이 절로 터졌다. 세월 갈수록 왜 들에 핀 작은 꽃들에 더 정감이 가는지, 소박하게 모여 이룬 은은한 향기의 편안함 때문인가.
물가에 사는 고마리는 더러운 물을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마워, 고마워하다가 고마리가 되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물고기들에겐 더없이 좋은 산란처를 제공한단다. 그뿐인가, 고마리는 지상에서도 꽃을 피우지만, 땅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것은 물론 땅속줄기로도 뻗어 가며 번식을 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고마리는 지상에 보이는 모든 잎과 줄기를 잃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준비를 해 놓은 모양인가 보다. 한낱 여린 풀 같기만 한 그 작은 식물의 생존 전략은 나의 게으른 안일함에 정신이 번쩍 나게 한다. 그 나름의 질긴 생명력과 다양한 삶의 방식이 경이롭다.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 수억 년을 살아온 식물 앞에서 섣불리 잘난 체하며 산다는 건 무의미한 일처럼 여겨진다.
식물의 겨울눈은 무더운 여름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늦가을에 완성한다고 한다. 겨울이 오면 나무들은 겨울눈을 남겨두고 잎을 떨구는데, 겨울눈은 여러 겹의 비늘잎으로 싸여 있단다. 또 그 비늘잎 위에 솜털이나 진액이 덮여 있어 추위로부터 보호된다 하니 신기한 자연의 섭리에 절로 고개가 숙인다.
새봄, 찬란한 꽃 피울 희망 안고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며 양지에서도 음지에서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는 식물의 겨울나기를 보며 준비하면 극복하기 쉽다는 또 하나의 진리를 배운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우러러 사는 나무들은 어찌 보면 우리 사람들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상대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 일부의 판단으로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갈등이 좀 빚어지는가. 근시안의 복닥거림 속 우리네 삶이 갑갑할 때가 많다.
숲 강의를 들었던 한 강사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길을 지나다 딱딱하고 시커먼 아스팔트 위를 뚫고 나온 연둣빛 싹을 보게 되었는데 볼수록 신기하더란다. 그 열악한 환경에서 비집고 올라온 싹이 기특하여 쭈그리고 앉아 새싹에 '어떻게 가능한 거니?' 물었다 한다. 얻은 답변은 '생각만 사라지면 쉬울 수 있다'는 거였다.
모든 일이 어렵다고 부정하고 긴장하면 아무것도 꿈꿀 수 없음은 당연하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고 했다. 결국,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일은 지나치게 생각이 많아서 일수도 있다. 자신의 틀 안에 가두지만 않는다면, 땅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일이 자연의 특별한 일만은 아닐 거다.
뜻하지 않은 인연으로 더 가까이서 얻게 된 숲의 풋풋함과 따뜻함, 심오함에 난 요즘 매료되어 있다. 글자로만 알던 막연한 이해가 아니고 잎 피고 꽃 지고 단풍드는 숲이 주는 온갖 공유와 공감의 경험으로 설렌다.
세상은 숱한 경쟁으로 갈등하고 불평과 모순이 가득해 때론 지치고 상처를 입기 일쑤이다. 그런 나를 숲은 어느새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너그럽게 품어주는 넓은 가슴으로 내어줌을 새삼 깨닫는다.
온갖 생명의 원천인 숲의 더욱 큰 존재감을 알수록 내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편협되고 어설펐는지 때론 작아지기도 한다. 숲은 또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주고 새로운 인생길을 그려내도록 하는 힘을 발휘도 한다.
이제는 숲처럼 깊고 영혼이 맑아지는 삶이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