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뜨락 - 할미꽃

2012.06.10 16:06:20

얼마 전 큰딸과 시골 친정집에 잠시 들렸다. 밥상을 물리고 차 한 잔을 마시는 도중에 어머니가 슬그머니 일어나셨다. 건넛방에 장롱문을 열더니 주섬주섬 옷을 몇 벌 꺼내어 침대 위에 늘어놓으셨다. 의아해하는 나를 바라보며 오는 토요일 동창 모임 나가는 데 어떤 옷이 좋을지 모르겠다며 멋쩍은 표정을 지으셨다.

옆에 있던 딸은 올해 팔순을 맞이한 할머니가 동창을 만난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나 하듯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다. 나 또한 어머니에게 이날까지 '동창'이라는 단어조차 처음 들어본 듯하여 뜻밖에 생소한 느낌부터 들었다.

평생을 종갓집 맏며느리로, 고된 농사일로, 자식 뒷바라지로 분주하기 이를 데 없이 살아온 어머니였다. 그동안 하루라도 온전하게 어머니가 어린 시절의 옛 친구를 만나 동심에 젖어 여유롭게 웃으며 담소를 나눈 일이 있었는지. 내 기억으로는 좀처럼 떠올려지지 않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친구들을 나이 팔십에 처음 만난다는 어머니 앞에 세월은 참 무상도 하다. 살아온 날 동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정한 당신만의 시간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입가에 미소가 번진 모습이 마냥 소녀 같기만 했다.

아마도 거리가 먼 곳에서의 만남이었다면 아쉽긴 했어도 어머니는 지레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시골 친구들의 번거로운 여러 사정을 생각해 도시에 사는 친구분들이 고향 가까운 곳으로 약속 장소를 정했던 모양이다. 연륜이 더할수록 친구란 존재의 소중함이 더 애틋해져서일까. 거동이 불편할 수 있는 연세임에도 친구의 안부가 그리워 먼 길 마다치 않는 노년의 우정이 따뜻하다.

어머니가 친구들 만남에 옷차림을 고민하는 모습이 왠지 반갑기도 하고 아이처럼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론 지금보다 젊고 고우셨을 때 그런 기쁨과 설렘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더 아릿하게 다가왔다.

나는 딸과 작당하여 옷장에서 요즘 입을 만한 어머니 옷을 모두 꺼내었다. 그동안 딸, 며느리들이 사다 드린 옷이 적지 않게 걸려 있었지만, 그 중 모임에서 어머니가 가장 돋보일 수 있는 연출을 해보겠다는 일념으로 어수선을 피웠다.

어머니는 우리가 모양과 빛깔, 구색을 갖춰 놓은 옷 몇 가지를 몸에 대보며 거울 앞에서 내내 쑥스러워하셨다. 아예 입어보시라고 성화를 부려도 '너희가 괜찮다 하는 걸 입고 갈란다' 하시며 손을 내저었다. 아마도 마음처럼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모양인가 보다. 기력이 달리시는 듯 털썩 주저앉고는 '노인네가 주책없지'라며 싱긋 웃고 마신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어머니 일평생 처음인 특별한 외출에 확실하게 기분 전환을 해 드리면 어떨까 싶었다. 친정 가까운 곳에 사는 작은 언니에게 몰래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분명히 의도를 알게 되면 완강하게 거절하실 게 분명해 언니와의 저녁 외식을 핑계로 어머니를 읍내로 모시고 나갔다.

식당이 아닌 옷가게 앞에 차를 세우자 어머니가 한사코 내리길 거부하셨다. 겨우 달래듯 옷가게 안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어머니는 괜한 돈 쓰지 말라며 망설이기만 하신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자꾸 어머니 시선이 연보라색 바탕에 작은 꽃무늬가 들어간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머물고 계시는 듯했다. 언니와 내가 서로 눈짓을 나눈 후 빙빙 돌다가 그 옷이 어머니께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선수를 쳤다.

임정숙 약력

△한국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샘 동인

△청주문인협회·충북수필문학회 총무 역임

△청주·청원 1인1책 펴내기 운동 팀장

△저서 수필집'흔드는 것은 바람이다'(2009년)

△문학공간 수필부문 신인상. 2007청주예술공로상 수상

△limjs60@hanmail.net


주름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출중했던 예전 어머니 미모가 되살아나는 듯 원피스는 정말 곱게 잘 어울렸다. 내친김에 신발가게로 어머니를 등 떠밀 듯 밀고 들어갔다. 편하고 시원해 보이는 흰색 샌들이 새 옷과 제법 맞았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흰머리가 눈에 걸렸다. 미장원에서 염색까지 마치고 나니 십년은 더 젊어 보이셨다. 괜한 말해서 너희에게 부담을 주었다고 미안해하는 어머니였지만, 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뭔가 할 일을 다한 듯 마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사실은 옷가게 탈의실에서 어머니 옷을 입혀 드리다가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었다. '우리 엄마 공주 같다.' 말은 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기역자처럼 더 잔뜩 굽어 있는 어머니 등을 가까이서 바라본 순간 목에서 왈칵 뜨거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저 와락 어머니를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모처럼 들뜬 어머니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눈치 없이 자꾸 눈자위가 붉어지려는 걸 애써 참으며 괜한 호들갑만 떨었다.

내가 중학교 시절 우연히 외국영화를 보다가 '오드리·헵번'이란 여배우를 처음 알게 되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벽에 걸린 가족사진 중에 어머니는 한복을 입으셨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와 갸름한 얼굴, 깊고도 또렷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이 꼭 오드리 헵번을 연상케 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친구들한테 오드리 헵번이 우리 엄마를 닮았다고 자랑을 하고 다닌 기억이 난다.

흑백사진 청초했던 어머니 모습은 이제 어디로 갔는지. 바람 불면 한 줌 마른 나뭇잎처럼 훅 날아갈 듯 작아진 어머니가 애처롭다.

세상 들녘, 고요하고 순박한 할미꽃이 되어버린 나의 어머니, 슬프지만 아름다운 꽃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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