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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직필을 찾아서 - 옥천출신 언론인 송건호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언론선비'
백지광고 사태로 후배기자 해직 자신도 사직
백수되자 고서적 파헤쳐 현대사 연구에 천착
고향 인근 옥천 보륜사에 위패로 모셔져 영면

  • 웹출고시간2014.02.20 17:50:29
  • 최종수정2014.02.20 17:53:01

생전의 송건호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송건호(宋建鎬·1927~2001)는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에서 아버지 송재찬과 어머니 박재호의 3남5녀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은진송씨로 조상은 대대로 충남 대덕군 동면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송건호의 증조부는 그런 가족을 이끌고 산너머 군북면 비야리로 이주했다.

옥천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그의 증조부는 민족의식이 강했다. 그는 나라가 망하자 왜놈들이 보기 싫다며 스스로의 호를 '하곡'이라 짓고는 첩첩산골로 찾아들었다.

언론인 송건호를 평생 지배한 반골정신은 어찌보면 이런 가통(家統) 때문에 유전적으로 획득됐다.

송건호는 옥천 증약보통학교 졸업 후 서울 한성사립학교를 거쳐 서울대 행정과에 입학했다. 그가 처음부터 신문기자를 꿈꿨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대학재학 때부터 <대한통신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사의 기자와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유신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그런 태도는 당시 정권에 곱게 보일리가 없었다.

1975년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정권은 신문 광고주 압박이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 <동아일보>를 압박했다. 그 결과, 신문 광고란이 백지 상태로 인쇄·배포되는 '백지광고사태'가 발생했다.

동아일보 1975년 1월 23일자 광고의 일부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들은 유신정권의 탄압에 대항, 자비로 '自由言論을 固守'라는 광고를 냈다.

그러자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은 주머니를 털어 1975년 1월 23일자에 '자유언론을 고수' 제목의 유료성명 광고를 냈다.

'동아일보사 편집국원들은 23일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하는 뜻에서 동아일보에 휘몰아치는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언론의 자류를 고수하고 진신하고 공종한 보도에 있는 힘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성명광고를 냈다. 송건호 편집국장을 비롯한 1백40여명의 편집국원들은 봉급을 일부는 모아 광고를 냈다.'(사진 참조)

사측은 권력에 굴복했다. 당시 정권은 문제 기자들의 해고를 요구했고, 그것이 현실화되자 송건호는 책임감을 느끼고 사직했다. 그리고 많이 울었다. 그는 당시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인 서중석(현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번이나 울었어요. 기자들 앞에서 울고 또 이제 그만두면 다시는 언론계에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아 울고, 그만둘 것인가를 며칠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있으려면 그냥 있을 수도 있었는데…."-<역사비평 통권 제 21호 255쪽>

직장을 잃은 그는 집과 고서점을 오가며 역사 연구, 특히 현대사에 천착했다. 그의 명저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국민족주의의 탐구', '한국현대사론' 등은 이때의 궁핍이 밑거름이 됐다.

어쩌면 이 시기는 송건호에게 있어 영혼이 가장 자유로운 시기였다. 그는 늦게 시작한 역사공부의 맛을 서중석 부소장과에게 이렇게 말했다.

'1975년 동아일보를 그만두고 15년 동안 쉰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됐어요. 그전부터 고서점을 자주 다녔는데 특히 그 15년 동안 많이 다녔어요. 그때는 형사가 따라 다니니까 친한 친구들도 다 피해버렸었요. 그래서 고서점이나 찾아다니며 혼자 세월을 보냈지요.'-<〃244쪽>

사실상 '백수'가 된 송건호는 유신정권으로부터 '편안한 자리'를 회유받았으나 "나의 길이 아니다"라며 모두 거절했다고 그후에 회고했다.

그런 선비정신이 가정경제를 책임져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당연법칙'처럼 가난이 찾아왔으나, 그 가난은 천상 백면선생이었던 그에게는 가혹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나와서는 생활고에도 몹시 시달렸어요. 그때는 내일은 또 뭐 먹고 사느냐가 제일 고민이었습니다. 아주 고민했어요, 심지어 자식들 대학공부도 못 가르치고(…) 둘째는 초급대학에 가라고 했고, 셋째는 고등학교만 다니고 말았어요."-<〃255쪽>

이런 송건호를 "민주화 운동을 하자"며 꼬신(?) 사람이 충북 제천출신 천관우였다. 여기에는 같은 서울대 동문이고 충북 출신이라는 동향 의식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초창기에는 절망에도 빠졌는데,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현기증이 돕니다. 현기증이 나고 구토가 나고 그래요. 에피소드도 참 많습니다. 그러다가 1977년 천관우씨가 민주화운동을 같이 하자고 꼬셔요, 그때부터 재야세력과 관련되기 시작했어요."-<〃 255쪽>

1979년 10.26 사태가 일어나고 이어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유신정권과 마찬가지로 군사정권은 그에게 회유의 손길을 뻗쳤다. 그는 서울시 시장 고문, 민족통일중앙협의획 고문 등 이런저런 제의를 받았으나 모두 뿌리쳤다.

송건호는 1980년 5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으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신군부는 김대중과 언론계와의 커넥션을 필요로 했고, 그 연결고리로 송건호가 지목됐다.

신군부는 송건호가 김대중에게서 거액의 돈을 받아 이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일명 동아투위)에 전달했다고 조작했다. 그는 그해 풀려났으나 몸은 서서히 무너져갔다. 1980년대의 고문은 송건호에게 온몸이 마비되는 파킨슨병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때부터 8년간의 투병 끝에 2001년 12월 21일 타계했다. 그의 장례식은 한국 언론인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송건호의 위패가 모셔진 옥천 보륜사 모습.

송건호는 고향 인근의 옥천 보륜사에 위패로 모셔져 영면하고 있다. 그는 언론선비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속마음은 다정다감했다.

"내 글에는 울분에 찬 내용이 많은데, 억압 속에서 글을 쓰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심정으로 글을 썼어요. 내 글을 보고서 울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가끔 그을 쓸 때 울면서 쓰기도 합니다."-<〃 246쪽>

/ 조혁연 대기자

두 사람 사이에 우정 존재했을까

대학동문에 충북이라는 동향 막역한 친구
5공들어 서먹서먹 끝내 관계회복 안된 듯

천관우와 송건호가 서로를 친구로 인식했다는 증거는 다수 발견된다. 송건우는 당시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1977년 천관우씨가 민주화운동을 같이 하자고 꼬셔요, 그때부터 재야세력과 관련되기 시작했어요"-<역사비평 통권 21호 255쪽>

인용문에 등장한 '꼬셔요'는 상당히 친한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송건호가 1979년 역저 '한국현대사론'을 출간했을 때도 발견된다.

그는 이때 '현대사를 기록하는 시각과 용기' 제목의 서평을 창작과 비평 제 52호(1979년 여름호)에 실었다. 그 내용이 서평치고는 무척 호의적이다.

"송건호 형의 이 새 저술은 정통사학에서 미처 이루지 못한 '현대사 개설'이라는 중요한 부분에 훌륭하게 선편(先鞭)을 지은 것이다. 그것은 어느 의미에서 정통 사학계에도 큰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하고 싶다."-<창작과 비평 제 52호 232쪽>

인용문중 '선편'은 '남보다 먼저 시작하거나 자리를 잡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어지는 문장은 친구 송건호를 역사학자로 인식했다.

"아뭏든, 1979년의 현재로, 우리 현대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한국현대사론'에 필적할 것이 얼른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 저술은 성공적이었고 또 그 만큼 축적된 근고(勤苦)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천관우가 5공에 일시적으로 협력하면서 둘 사이에는 틈이 생겼고, 이후로는 예전의 우정을 회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송건호는 이즘의 둘 관계를 이렇게 언급했다.

"지성이라 부를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현실과 타협해버린 경우가 있어서 결국 사이가 서먹서먹해지고 그러는데 죽은 사람이지만 천관우가 그런 사람입니다."-<역사와 비평 통권 제 21호 253쪽>

시대의 불우가 두 사람의 우정을 금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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