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성향에 비해 읽는 품은 다소 거칠다. 페이지를 찢거나 하지는 않지만, 인상 깊거나 마음에 드는 구절, 새로운 정보거나 기억해 두고 싶은 내용에는 거침없이 밑줄을 긋는다.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는 일도 잦다. 책이 소중한 사물이기는 해도, 책이 책 답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읽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밑줄 등으로 표시를 하고, 메모를 해 두면 읽은 후 늘 하는 작업이 수월해진다. 독서록을 만드는 작업이다. 처음에는 기억력의 한계를 보완하겠다는 의도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어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으레 책의 주요 내용을 별도의 파일에 옮겨 담는 과정을 거친다. 주로 읽으며 밑줄을 그어놓은 내용들이 옮기기의 대상이 된다. 드물기는 해도 메모를 바탕으로 짧거나 긴 독후감을 쓰는 일도 있다.
이십여 년간 그렇게 작성해 온 독서록 파일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어느 날 문득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었으니 일종의 되돌아보기 작업이 부자연스런 모습은 아닐 터였다.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파일을 모으기 시작했다. 연도별로 정리는 해 왔지만 각각의 파일에 작성했으니, 일관성은 희박하다. 형식은 물론이고 파일 이름도 제각각이다. 그래도 무엇이든 세월이 흐르면 쌓이기 마련이다. 며칠간 시간을 들여 모아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양이 많다. 공연히 시작했나 싶은 후회가 잠깐 들었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중간에서 그만두기도 뻘쭘하다. 내친김에 여러 개의 파일을 하나의 파일로 묶지 않을 수 없었다. 밭에서 금방 뽑아온 배추를 다듬듯, 사소하거나 가벼운 내용들 짤막한 단상만 기록된 부분은 과감하게 때때론 아쉬워하면서 덜어냈다. 시사주간지며 문학과 환경 관련 월간지에서 발췌해 놓은 기록도 많다. 이렇게 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주로 시류를 타는 내용들이라 옮김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렇게 정리를 해 놓고 보니, 덜어낼 만큼 덜어냈음에도 천 페이지가 훨씬 넘는 분량의 파일이 만들어졌다. 누적된 햇수에 비해 읽은 책이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독서를 좋아한다는 축에 못 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에 다소 안심은 된다. 그런데 이번엔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긴다. 그래서 이걸 어쩐다.
발상을 바꾸는 일은 이런 때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정리를 하기로 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출판은 아니다. 파일을 책의 형태로 변환해 보자는 의도다. 그러면 책꽂이에 꽂아 두고 틈틈이 살펴보기에도 용이할 터였다. 단 한 권이라도 제본을 해줄 인쇄소는 찾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려면 독서록을 다듬기 위해 다시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겠지만, 필요하다면 몇 달이 걸려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미 작업을 시작한 지 한 달여가 지났다. 속도는 지지부진해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새로운 고민은 예상치 못한 데서 비롯되곤 한다. 이 내용들을 글감으로 삼아 아예 새로운 글을 쓰고, 새 책을 내 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라는 속삭임이 시작되었다. 시간은 물론 능력도 부족한데, 새로운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