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는 말은 좋은 이야기이다. 뭔지도 모르면서 좋아했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은 초등학교 때로 거슬러 간다. 동성 친구들끼리 남몰래 우리 반에서 누가 제일 이쁜가라는 논의를 하곤 했다. 그때 생겨난 예쁜것이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논의는 초등 수준에서 제법 진지한 고민을 통해 결론이 주어졌다. 싱거운 결과가 나오긴 했지만 기억 나는 몇 가지가 있었다.
예쁜 급우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견은 갈리곤 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각자 이유는 있었다. 이유를 나열하자면, 1. 나에게 친절한 여자친구를 의리로 뽑는 경우. 2. 학생이니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선생님이 이뻐하시니 그냥 휩쓸린 느낌이 컸다) 3. 잘 꾸미는 부잣집 여학생. 이 정도였던 것 같다. 성격, 지성, 경제력으로 나눴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었을까· 그래도 이런 행위는 누굴 품평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당시 순수했던 소년들 간의 집단 의견 개진 정도로 너그러이 생각해주시길 바란다. 당시 의견 개진에서 아름다움이라는 막연함은 개개인 별로 달랐다. 줏대 없는 소년들이라 목소리 큰 아이의 의견으로 통일되곤 했지만, 가슴 속 깊이까진 동의 못 했으나 '우리 소원은 통일'이니 그냥 따르자 정도로 넘어갔다. 표면적으로는 압도적 1인에게 몰아주는 분위기였다.
"아름다울 미(美)" 자는 우리말에서 '아름답다'라는 뜻을 가지며, 한자로는 美라고 쓴다. 양이라는 글자를 큰 대자가 받들고 서 있는 글자이다. 큰 양은 살찐 양이라는 뜻이다. 돼지와 달리 양은 중국에서 아주 귀한, 대접받던 동물이다. 양은 순해서 사람을 잘 따르고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도 잘 따르며 젖, 고기, 가죽 등 모든 부산물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유용한 동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이뻐 보일 수밖에!
양이 크고 훌륭하다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귀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美'는 '보기 좋은 것'이 아니라 '지극히 좋고 가치 있는 상태'를 나타내게 되었다. 美는 외면의 아름다움만을 뜻하지 않는다. 도리어 마음이 바르고, 삶이 균형 잡혀 있으며, 인간과 자연,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일컫는다. 공자는 至善則美也(지선즉미야)"지극히 선한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 말했고, 후대의 학자들은 미를 선과 나란히 두며 윤리와 예술, 존재의 본질을 함께 이야기했다. "文質彬彬 然後君子아주 좋은 구절이야!
"文質彬彬 然後君子(문질빈빈 연후군자), 문(文)과 질(質)이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군자다," 문(文)은 겉모습이나 형식의 아름다움이고, 질(質)은 마음의 성실함, 인격적 진실성이다. 이것은 동양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은 아름다움은 곧 질서와 조화라고 봤다. "아름다움은 영혼이 질서 있는 형태와 만날 때 느끼는 평온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미를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조화와 질서가 현대에 와서는 더 다양하게 변화가 되었다. 칸트는 이런 아름다움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철학자다. 칸트는 아름다움 정의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Zweckmaßigkeit ohne Zweck)으로 정의 했다. 어떤 사물이 실제 목적이나 쓰임은 없지만, 형식적으로 조화롭고 의미 있어 보일 때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은 감성과 이성이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자율적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 느낌은 주관적이지만, 사람들은 그 감정을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따라서 칸트에게 아름다움이란, 개념 없이 느껴지는 형식적 기쁨이자 자유로운 정신 활동의 표현으로 정의 했다.
과거나 칸트의 미를 넘어, 오늘날 감각과 감정의 충돌 속에서 생기는 진실적 순간이 바로 아름다움으로 이야기한다. 어릴 적 소녀를 보며 누가 더 이쁜가에 대한 무 지성적 논의 속에도 어떻게든 진실에 각자 다가가는 감각의 떨림이 있었다. 이런 행위가 이렇듯 복잡한 미학적 논의를 수반한 일이었다니 신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