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생
6개월에 걸친 그간의 글과 그림도 오늘로 마지막 시간이다. 평소 글쓰기와 그림을 좋아하는 나로서도 반복된 약속시간을 맞추기에는 적잖게 빠듯하고 나름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형식적 외부의 시간 맞추기는 좋은 점도 없진 않다. 게을러질 수도 있음에 때론 채찍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평소 나의 철학과 나름의 세계를 평이한 방법보다는 다소 딱딱하고 직설적 표현으로 일관할 때도 있었고, 은유한 표현들로 인지할 수 있는 자들에게는 더욱 뜨겁게 다가설 수 있도록 설토할 때도 있었다. 어쩌면 이러한 지금까지의 글들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중요한 것들이었지만 작가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작가들에게로 향한 외침이었고, 그건 내 자신에게로 향한 다짐일 수도 있었다. 외침에 비해 공허한 메아리로 감지될 때는 당장이라도 던져내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강요하거나 자만하거나 무지함으로 다가설 수도 있는 것들의 위험성 중 하나는 말 외에 글쓰기였기에 책무의 어깨는 가벼울 수가 없었다. 책임 없는 자유는 방종이기에 그만큼 신중해야함을 글 쓰는 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간의 심로성토는 나 자신에게도 공부였고 기쁨이었다. 이제 새로 지필 할 더 멋진 사람을 기대해 본다. 늘 듣는 이야기지만 남자는 나갈 때 나갈 줄 알고 버릴 때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미련자체에 머물면 추함이 크게 보이게 된다. 그간의 내용 중에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열매의 이치를 강조해 왔기에 이번 연재의 '텅 빈 충만'으로 시작된 글을 역시 '텅 빈 충만'으로 맺고 싶다.
사랑도 넘치면 아름답지 않다. 넘쳐 추하면 모자람만 못하다. 모든 계획과 삶의 열정도 '절제'를 수반할 때 아름다움이 지속되는 것처럼, 비우지 않고서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상기하고 싶다. 그간 일관했던 여백미, 비움, 소요유, 허와 실, 미니멀 등의 이야기들은 결국 상통하는 동일언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의 훈련으로 남는 잉여는 '고요함'이다.
판단할 눈이 있어도 소경을 자처하는 지혜의 눈이 있어야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로 여과하는 마음의 귀가 있어야하고, 토해낼 입이 있어도 재갈을 물려 벙어리로 내면의 소리를 낼 줄 아는 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고요함'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것을 지불해야 했다. 온 몸의 세포들마저 애곡하며 눈과 귀와 입의 고요에 고마워했다. 물을 대신한 나의 눈물은 수묵화의 번짐을 도왔고, 떨어지는 온 몸의 땀들 역시 수묵화의 범람에 동참했으며, 순간의 분노로 붓의 파괴와 나의 육신에 괴로움의 절규를 스스로 환영했다. 실컷 통곡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무진장 가벼워진다. 이것이 인간이 아닐까·
가벼움· 그렇다. 비울 때에 가벼워진다.
고요함· 그렇다. 비울 때에 고요해진다.
여백!
그것은 텅 빈 충만이다.
그것은 채워진 빈자리이다.
그것은 가벼운 중량감이다.
그것은 숨 쉬는 공간이다.
비움으로 채울 수 있기에 나는 그 여백을 사랑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