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생
대상물을 그린다는 것은 우리의 눈을 통한 관찰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관념적으로 직접 보지 않고 그리는 예도 있지만 시각적 언어인 그림은 어떠한 대상을 관찰하는 것부터 출발한다. 나아가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우리는 무엇(What)을 표현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무엇을 어떻게(How) 그릴 것인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왜(Why) 그림을 그려야 하는가· 에 대한 물음이 있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일련의 생각 없이 대상물을 그저 표현해 내려고만 한다면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 궁극의 물음도 도출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 속에 내재된 '왜(Why)'의 물음에 대한 성찰이 없을 때는 표피주의에 빠지고 만다. 내용을 모르고 형식적 틀만을 의식하는 겉 표면의 치장에 불과하여 본질을 망각한 결과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우리의 눈앞에 놓여 있는 대상물을 어떠한 방식으로 보아야하는가?에 따라 실제적 결과물은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다. 대상물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에 앞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그리는 자의 자세라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그림의 시점(視點)이라는 것이 있고, 투시법, 소실점, 삼원법, 원근법, 구도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구도와 보는 사람의 관찰 시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곽희(郭熙)'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의 북송(北宋) 때의 화가로 북송 산수화 양식을 완성하여 사생에만 얽매지 않고 산수화의 이상화된 마음속의 산수로 끌어내어 화면에 포치하기 위한 시점의 다변화를 이론으로 펼친 것이 곽희의 유명한 화론인 '임천고치(林泉高致)'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삼원법(三遠法)은 고원법, 심원법, 평원법을 말한다. 이는 각각 올려다 본 시점, 내려다 본 시점, 수평적 시점 등을 말하며, 더 재미있는 것은 독립된 각 시점에 일치한 시점만의 고집에서 이러한 시점을 한 화면에 복합적으로 적용했다는 것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이는 곧 산점투시(散點透視)를 의미한다.
르네상스시대 서구 미술을 지배해 오며, 환영적 사실주의를 꾀했던 전통적 방법은 '一点원근법'이었다. 이는 화면에서 시점의 통일성을 요구하게 되어 관찰자로 하여금 형태의 사실적 화면을 느끼게 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뛰어넘어 동양에서도 다시점(多視點)을 통한 화면전개방식이 있었고, 서양에서도 익히 찾아볼 수 있다. 일점원근법을 버리게 되고 복수시점(複數視點)을 도입한 것은 '산점투시'와 동일한 것이다. 한 화면 속에 고원, 심원, 평원 등의 적용은 흩어진 시점 즉 복수시점을 말한다. 바로 상반된 논리를 동시다발적 표현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큐비즘의 혁명이라 할 수 있는데, 큐비즘은 대상을 해체하고, 시점을 이동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본 대상을 자유롭게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이는 우리나라 '정선'의 '하경산수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관된 시점의 '원근법'이 사라지는 것은 20세기 현대미술을 탄생시킨 후기인상주의의 세잔느Paul C·uzanne(1839-1906)의 회화를 보면 '양식'만 존재할 뿐 '원근법'이 사라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르네상스에 의해 완성된 환영적 사실주의로부터 일탈되어짐을 의미하며, 현대회화에 있어 평면회화의 형식을 탄생시키는 중요한 역할이 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릴 때 언제나 정확한 형태와 배치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산점투시와 큐비즘 등의 이야기는 작가의 자유로운 배치를 말함이다. 하지만 알고 빼는 것과 모르고 빠트리는 것은 다른 것이다. 실력이 있어서 '산점투시'를 적용하는 것과 실력이 없어서 하다보니 '복수시점'이 된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이와 연결되는 중요한 이야기를 언급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