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남은 봄이 먼저 오는 마을이다

2025.05.26 14:58:17

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먼 산 너머 꽃잎을 몰고 온 봄이 마당까지 성큼 들어서면, 마을 전체가 하나의 장(場)이 되어 들썩인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 아홉 시 면사무소 앞 공터는 장마당 준비로 한창이다. 겨우내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빈 그릇과 가스버너, 탁자와 의자들이 먼지를 딛고 햇빛 아래 줄을 맞춘다. 부녀회의 장터 팀은 국수를 삶고 어묵을 끓이며, 부침개를 부치고 밑반찬을 내느라 손이 모자란다. 연기와 냄새가 엉켜 피어오르면, 봄빛 아래 마을도 함께 들끓는다.

간이 탁자엔 미나리, 두릅, 곰취, 옻순 같은 봄나물과 참기름, 들기름, 햇잡곡이 곁들인 식혜도 가지런히 놓여 찾아오는 발길에 팔려 나가기를 기다린다. 안남에서 기르고 자란 곡식들, 가격도 저렴하고 믿음이 간다. 커다란 솥에서는 멸치 육수가 끓고, 가죽나무순 부침개가 고소한 냄새로 사람들을 하나둘 장터로 발길을 하게 만든다. 구제 옷과 장식품이 깔린 작은 난전은 마을 도서관에 보탬이 되는 정성으로 채워지고, 무명 가수의 음정도 봄볕 아래선 노래가 되어 흥을 높인다.

국수를 내어주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웃음을 내어 보이고, 음식 앞에 모인 얼굴들은 유채꽃처럼 환하다. 자전거동호회, 고향을 찾은 사람들, 간만에 바람을 쐬러 나온 타지인들과 뒤섞인 장터 옆 장독대 위 햇살은 반짝이고, 그 아래 금낭화와 꽃잔디, 해맑은 민들레, 부풀어 오른 모란이 벌들을 끌어모으며 사람들을 반긴다. 장터는 어느새 봄의 정원처럼 시끌시끌해진다. 길가엔 자전거들이 엎드려 있고, 아이들은 바람을 타고 장터 끝까지 달린다. 뻐꾸기 소리가 멀리서 따라오고, 파란 하늘엔 봄볕 실은 구름이 두둥실 떠나간다.

나는 장이 서는 날이면 꽃샘바람을 떠올린다. 따뜻해질 듯 말 듯 망설이던 바람도 장날엔 살결을 스친다. 복사꽃은 졌지만 웃음은 바람보다 오래 머문다. 누군가는 "여긴 늘 이맘때가 제일 좋다"며 국수를 두 그릇째 비우고, 누군가는 마을 골목 골목을 돌아보고 초등학교도 돌아보고 개울가도 거닐어 눈으로 담아 가기도 한다. 그리움이란 것도 계절을 타는 것인지, 아련한 아지랑이의 기억이 봄꽃 향기처럼 맡아진다 집집이 꽃 한 그루는 다 피어냈으니 마음에 부자다.

한때는 큰 장이 서고 사람들이 북적였지만, 지금은 1,300명이 사는 조용한 면이 되었다. 초등학교는 폐교 문턱에 서 있고, 농사일은 줄고, 젊은이는 떠났지만. 그래도 우리는 안부를 묻고, 이름을 부르고, 막걸리를 권하고, 삶을 꺼내 보이다 다시 조심스레 정을 담아 다음 달을 기약한다.

봄은 풀빛으로 오고, 사람은 정으로 모인다. 그렇게, 안남엔 봄이 스며든다.

*안남: 충북 옥천군 면소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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