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골 여울

2025.04.20 14:36:39

남호순

시인·배바우도서관장

강은 산과 계절을 잇는 끈이다. 바람이 키운 물결은 따뜻한 손이 되어, 산에 꽃을 불어넣는다.

옥천군 안남면 연주리, 강 건너 동이면 갈마골이라 불리는 곳. 강이 굽이돌며 자갈을 굴려 여울을 만들고, 밤이면 별들이 투망질하고 낮에는 은빛 은어가 돌 틈에 숨어 별처럼 반짝인다. 여울 깊은 시간에 묻혔던 기억이 되살아나 인기척에 놀란 고라니처럼 따라가 본다.

여~울, 단어만 읽어도 자갈 굴리는 물소리가 들릴 것 같다. 바지를 걷고 물에 발을 들이면, 종아리를 스치는 물살이 부드럽다. 발을 헛디뎌 우스꽝스럽게 넘어져 옷이 젖어도 좋다. 햇살이 드리운 자갈 위로 간질이는 물결을 지나며, "곧 갈 테니 먼저 가"라는 소리가 건너는 내내 만들어져, 그 끝에서 또 다른 여울이 이어졌고 여울이 멈추는 곳에서 강은 기다리고 있었다.

걷어 올린 바지를 내리고, 따뜻한 맨발을 돌 위에 올리면 마음도 잔잔히 가라앉는다. 산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흐트러졌다 다시 모이길 반복한다. 꽃은 향과 꿀을 퍼뜨리며 열매로 가는 입문이 되고, 그 속을 걷다 보면 마을 사람들의 흔적이 돌담과 계곡에 저장되어 있다가 아지랑이처럼 피어날 것 같다. 돌담 옆에는 오래전 누군가 심어둔 수국이 줄기를 뻗고, 그 곁으로는 버려진 장화 한 켤레가 마치 누군가 막 다녀간 듯 놓여 있다. 바람이 스치고 간 자리마다, 이름 모를 발자국들이 겹겹이 겹쳐 있다. 봄날은 그렇게 십 년 전의 일을 포개며 지나간다.

강은 하고 싶은 말을 삼키듯 속으로만 웅얼거리고 있을 뿐,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바람에 날리는 물결 자락이 햇살에 너울을 탔다. 바람 성한 곳에 사람이 산다고 했지만, 바람은 성해도 인기척은 드물다. 쑥과 큰 개불알꽃, 그리고 냉이꽃이 밭과 논에 곱살하게 피어 있다. 개구리울음만이 시끄럽게 들려온다. 점점 고령화되고 아이가 없는 마을로 변해도 돌고 돌아 봄은 피고 지는 것이 아름다움일까. 꽃잎을 타고 흘러온 시간은 묻지 않는다. 벼꽃 필 무렵 은어처럼 천만리 밖에 몸을 두고도 고향이 그리워 온다고 했다. 여울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기다림은 다정한 잔물결이 되고, 돌아오지 못한 이름들을 하나둘 부른다. 돌을 문지르며 다듬어낸 그 말들은, 오래 묵은 그리움처럼 은근하고 또렷하다. 어떤 소리는 물에 젖은 편지 같고, 어떤 소리는 다 타지 못한 쑥불처럼 여운을 남긴다. 그렇게 여울은 흐르면서도 멈추어 서서, 오지 않는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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