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새순이 누렇게 말라간다. 담장이든 밭두렁이든, 남의 집 호박은 하늘을 뚫을 기세로 힘을 뻗쳐 나가는데, 왜 내 것만 이럴까… 남의 밭은 푸르고 힘차게 자라는데, 내 것만 시들고 처지는 것 같다. 생각해 봐도 초보 농사꾼이 알 턱이 없으니, 남의 호박은 부럽기만 하고 내 것에는 성질만 나니, 뜨거운 햇살이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 구덩이만 해도 서른 구덩이가 넘는데,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초조해진다.
어릴 적 기억에, 어머니는 아무 곳에나 심어도 달덩이 같은 호박을 키웠다.
분명 내가 보지 못한 숨은 비법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시중에서 오천 원짜리 거름을 사다가 썼으니 그런가, 의심만 파고들었다. 호박들이 왜 이렇게 헐렁한지, 아, 이게 뭐지 문제가 뭘까 비료를 더 뿌려야 할까 아니면 비닐을 깔지 않아서 그런 걸까.
옆 아줌씨 밭에는 호박순이 펑퍼짐하게 넓게 펼쳐져 있고, 마치 엉덩이처럼 둥글고 넉넉한 반달 모양을 하고 있다. 저런 호박이 자라려면 무엇이 달라야 할까, 싶어 슬쩍 물어볼까 하다가도 농사꾼 체면을 따져 본다. 아, 체면이 밥을 먹여주나… 호박농사 망치게 생겼구만, 체면 무시! 동네 말이 무서워 자꾸 고개가 시무룩해지는 호박순을 두고, 오후 무렵, 면에 살고 있는 동생이 만나자고 해서 대낮에 갈비를 뜯고 냉면까지 대접받았다.
그런데, 갈비를 먹으면서 주고받던 대화에 동생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는 듯했다. 그런 분위기를 느낀 나는 물어볼까 말까 망설였다. "내가 노름을 해서 백만 원을 잃었어."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의 눈빛을 마주쳤다. 거금 백만 원을 이런 귀퉁배기 맞을 놈, 상습범은 아닌 것 같아 실수로 인정하고 나는 거짓 없이 제수씨한테 자수하라고 일렀다. "또 그러면 볼 생각 말라"고, 도박은 습관이요, 병들면 낫지 않으니 얼른 끊으라고 일침을 놓았다. 갈비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양념이란 이런 거구나 참, 소갈머리도 없이 배가 포만감을 불렀다.
산등성이에 해가 기울고, 어둠이 밭머리 길을 감추고 고요해진다. 하늘도 점점 검은 천을 펼치듯 차분히 내려놓고 있다. 호박에 거름이 부족해서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적당히 삭힌 소똥을 주면 바로 살아날 것이라며, 욕바가지 얻어먹은 동생이 일러주었다.
소똥, 소똥 생각하다가 윗마을 한우 축사에 흔하게 널린 소똥을 얻으러 갔다. 주인은 보이지 않고, 태국에서 온 청년만 덩그러니 서 있다. "소똥 좀 퍼가야 하는데," 내가 물으니, 청년은… 전화 걸어, 사장님 소똥 가져가.반말 비스므리하게 내던진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똥을 치워 주는데 수고비는 못 받을지언정 잔소리는 듣지 않겠지. 손수레에 소똥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가득 담아봤자, 구덩이 몇 개 채우면 끝이다. 주인이 오기 전에 얼른 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똥 훔쳐갔다"는 한 마디 넘어 두 마디를 들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똥 퍼가다 잡혔다고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없잖아? 내심 괜찮다고 생각하며 소똥을 퍼가기로 한다.
소들이 내 눈을 반짝이며 쳐다본다. 뭘 봐, 임마.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자, 송아지들은 바로 "움모오~" "움모~" 울기 시작한다. 소가 무슨 말을 알아듣는 걸까? 싶은데 저런 자식들이 다 있나? 내가 쩌렁쩌렁 울리자 어미 소들이 다 몰려나와서 덤벼들 듯하다. "뭐여, 소여물이라도 주려나?"
이놈들, 나중에 큰 호박이라도 하나 줄 테니 조용히 해라, 쉿, 쉬쉬. 말을 알아먹는지, 소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눈을 크게 뜬다. 날이 더 어두워져 간다. 어두움 앞에서 채소들은 민감하다. 연하다는 말이 어쩌면 겁이 잔뜩 들어 있다 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달이 둥실 떠 있다.
호박순이 부러지기 직전에 잡초도 뽑아야 하고, 구덩이에 거름도 메워야 한다. 산딸기나무도 자라내줘야 하고. 구덩이를 손봐야 한다는 압박감에 쫓기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몸은 쉬고 싶다. 어디까지 일을 했는지 표시 삼아 흙이 묻은 장갑을 작대기에 씌워두며 혹시라도 지네가 들어갈까 걱정을 집어 먹는다. 지네에 물리면 벌에 쏘인 것처럼 따끔하고 벌겋게 부어오른다. 생각만 해도, 많은 다리가 온몸으로 기어오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징그럽다. 하지만 아직 시골은 깨끗하다. 환경이 총총한 별이 내려앉기 쉽게 깨끗하다. 내일을 기약하며 삽을 땅에 꽂았다.
오늘은 무릎에 기름칠이라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뻐근하다. 무릎관절이 내 밥줄이오, 서서 걷는 나에게 무릎은 기둥 같은 존재. 그래도 아직 허리는 괜찮다. 구부려서 남은 호박 구덩이에 소똥을 채워야지. 오늘은 윗마을 축사 사장님도 계실 터. 정식으로 소똥을 퍼가겠다고 신고하고, 어제 쪼끔 퍼갔던 것도 자백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