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봄날 오후 가만히 앉아 멍 때리기를 합니다. 꽃봉오리를 터트릴 거 같이 물이 가득 차오른 칼랑코에가 눈에 들어옵니다. 수선화는 이제 곧 꽃을 피우려는지 파릇파릇하게 키가 쑥쑥 자랐습니다. 봄을 알려오는 꽃들을 보니 집 근처 명암저수지라도 한 바퀴 걷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몸은 생각과는 달리 젖은 솜이불처럼 무겁기만 합니다. 그냥 가끔씩 와서 지저귀는 직박구리와 까치 소리 들으며 또 가끔은 하늘도 바라보고 멍 때리기를 계속 즐기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입에 빨리빨리를 달고 살아온 탓에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옷을 입은 것처럼 휑하게 느껴집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거실 한가운데 있는 텔레비전에 눈길이 갑니다. 전원을 켜기만 하면 다채로운 모양과 색들이 눈을 호강시키는데 오늘은 세련된 검은빛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텔레비전을 바라보니 블랙을 좋아하는 손주 생각에 얼굴에는 저절로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다양한 색채 놀이를 좋아하는 손주는 유독 블랙을 좋아합니다. 그 많은 찰흙 중에 검은색 찰흙을 찾는 아이입니다. 왜 검은빛을 좋아하는지 블랙을 머금고 있는 텔레비전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느꼈던 색깔이었을까? 그래서 블랙에서 편안함과 안정을 찾는 걸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36개월 전 아이에게 "엄마 뱃속은 무슨 색이었어?"라고 물어보면 아이는 어둡고 캄캄한 검은색이었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 지낸 일들을 이야기하는 아이는 어떤 지능을 갖고 있는 걸까요? 생명의 신비로움에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겨우내 얼었던 땅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이제는 손바닥 한 뼘 정도 자란 수선화는 겨울을 이겨내고 어떤 색의 꽃대를 내밀는지 설레기만 합니다.
블랙, 어둠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짙은 어둠이 걷히고 환한 태양이 떠오르는 동트기 전 하늘처럼, 긴 엄동설한 이겨내고 파릇한 새싹을 틔우는 양분의 흙처럼, 온갖 흥미 있는 이야기와 호화로운 칼라를 담고 있는 블랙 텔레비전처럼. 블랙은 세련되고 절제된 아름다움, 생명을 잉태하고 보물을 간직한 신비로움이 존재하는 절망이 아닌 희망의 전령사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