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뤼순감옥

2025.02.19 13:48:04

김경숙

청주시평생학습관장

밝은 정월 대보름달이 새하얗게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무슨 소원을 빌어볼까 유난히도 밝은 달을 바라보니, 며칠 전 뤼순감옥을 방문했을 때 기억이 몸을 움츠리게 합니다. 삼엄한 경비를 위한 특별한 내부 구조. 인간의 존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형 도구들, 얇은 옷과 모자. 독채에 홀로 수감되어 차디찬 공간에서 하얀 수의를 입고 있던 안중근 의사 모습이 눈앞에 머물며 가슴이 아려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 벌판에서 온갖 고생을 한 항일 애국지사들이 수용되었던 뤼순감옥에는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차디찬 바람이 머물러있습니다. 옷을 겹겹이 입고 털목도리로 목을 감았어도 한기가 느껴지는데 얇은 홑겹 옷을 걸치고 살을 에는 추위를 어떻게 견뎠을까 생각하니 목이 메어옵니다. 냉기가 도는 감옥 속에서도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라며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생각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은 사상가. 개인을 살인한 것이 아니고 조선인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은 전범세력을 처단했음을 당당하게 주장한 철학자. 더 놀라운 일은 그러한 아들에게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기도 어려운 의연함에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결혼 후 어머니가 하얀 면으로 배냇저고리를 지어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태어날 손주의 건강과 장수를 바라는 어머니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새하얀 천을 끊어 정성스레 면 기저귀도 만들어 주셨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장롱 속에 삼베로 만든 수의를 보관해 놓고 가끔 꺼내 보셨던 생각도 납니다. 배냇저고리와 수의를 한 땀 한 땀 떠가며 정성을 다하는 바느질이 생(生과) 사(死)를 맞이하는 예(禮)를 갖추는 마음 자세는 아니었을까 유추(類推) 해봅니다.

조마리아 여사가 아들에게 입힐 수의를 한 땀 한 땀 바느질 할 때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뎌냈을까 생각해 봅니다. 안중근 의사가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앞둔 아들의 수의를 짓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죽음을 맞은 1910년 3월 26일(음력 2월 16일) 조마리아 여사는 보름달을 보며 애끊는 아픔을 견디지 않았을까요?

시간의 흐름 속에 많은 것을 흘려보내고 나라의 소중함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고 있는 내게 뤼순감옥을 방문했던 여정이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합니다. 나의 안위(安慰)와 가족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들을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뤼순감옥은 아직도 냉기가 가득합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안내하는 항일 애국지사 후손들은 오늘도 온열 기구 하나 없이 추위를 온몸으로 감싸 안고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이 뤼순감옥을 방문하여 애국지사 후손들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밝은 달님에게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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