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기온이 0도에 가깝게 내려갔다. 조락의 계절답게 예술의 전당 가는 길과 봉명로 가로수옆에 노란 가을 카펫이 깔렸다. 바라보는 노소녀의 마음은 설렌다. 그 눈길 속에는 온통 지난날들이 가득히 담긴다. 그 길을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스마트폰에 담아 태평양 건너로 보낸다. 그곳에 담긴 파란 가을하늘과 도로옆의 노란 가을길을.
유난히 고운 은행잎은 가을 이맘때면 가로수나 마을 길에서 환한 불을 밝힌다. 가로수가 은행나무인 곳은 요즈음 노란 빛깔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한다. 그 노란 잎 속엔 내 어린 시절이 담겨있다. 놀잇감이 없었던 유년시절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을 주어서 열 개씩 묶어 산수놀이도 했고, 한 움큼씩 두 손에 가득 담아 파란 하늘에 던져보며 노란 눈놀이와 미술놀이도 열심히 했다. 그 은행잎은 작은 꿈 싸라기처럼 주변에서 함께 살았던 것 같다. 그때는 지금처럼 은행잎도 흔하지 않았다. 주어서 책속에 끼워 말려서 가끔은 코팅해 책갈피를 만들기도 했던 기억이 아득하다. 아련한 기억들이 이젠 많이 퇴색되어 스쳐 지나간 영상에 불과하다.
은행나무는 고운 빛깔과는 달리 노란 잎에는 벌레를 퇴치하는 성분이 담겨 있어서 가을에 떨어진 은행잎을 말려서 집안에 곳곳에 두면 바퀴벌레도 없어진다고 한다. 몇 년 전에 그 말을 듣고 한번 집안 곳곳에 말린 은행잎을 둔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가끔 출몰하던 바퀴벌레를 퇴치한 적도 있다. 아직도 은행잎을 보면 마음이 설렌다. 그냥 지나치지 않고 메아리의 여운처럼 스며든다. 초등학교 다닐 때 정겹게 부르던 동요도 솟아오르는 아침해처럼 선명하게 생각난다.
가을바람 솔솔솔 불어오더니 /은행잎은 한 잎 두 잎 물들여져요.
지난봄에 언니가 서울 가시며 /은행잎이 물들면은 오신다더니
어제저녁 바람에 찬 서리 내려 /은행은 한 잎 두 잎 떨어지고요
서울 가신 언니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안경 쓰신 담임선생님께서 연주하시는 오르간에 맞춰 부르던 노래, 마음속엔 노랗게 물든 은행잎처럼 애잔하게 남아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 새싹이 돋는 봄날처럼 아른거린다. 마음마저 늙어 버리면 서글플 텐데.
늘 이런 꿈속에 사는 것이 나 자신인 줄 안다. 어찌 보면 부끄럽기도 하다. 왜 늘 그런 작은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사는지. 어떤 때는 야속할 때도 있다. 문학소녀도 아니고 나이 많이 든 내가 너무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을길은 쓸쓸함이 조금씩 감돈다. 바람도 차졌다. 몸도 움츠려져서 얼른 실내로 들어오고픈 생각만 난다. 어느 사이 계절이 그리 달라졌는지. 세월은 참 빠르다.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인데 그 강하던 여름도 계절 앞엔 어쩔 수 없이 가을을 맞이하고 또 가을은 겨울을 서서히 받아들인다. 계절은 사람들처럼 무질서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들의 할 일을 순서에 맞게 연출해 간다. 삶을 초월한 철학자들처럼 위대하다. 햇볕이 그리운 계절이 가까이 다가온다.
노란 가을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