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의 내 모습처럼

2023.01.15 16:08:54

구본숙

미술평론가·수필가

아이가 미술 학원에 다니며 종종 완성작을 들고 온다. 어린 시절의 미술 교육은 단지 표현 기법에만 국한되지 않고 소근육의 발달과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하루는 아이가 사계절에 관련된 그림을 그려왔다. 아직 미숙하지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계절의 느낌을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고 벌과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 커다란 벌집이 그려진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여름에는 해변의 모래와 바다를 그렸으며 겨울의 모습은 크리스마스트리와 눈사람이 있는 설경을 묘사했다.

반면, 가을을 표현한 모습은 풍경적 요소가 아닌 추석의 차례상을 그려놓았다. 가을이라는 의미 부여를 하고 인상 깊었던 추석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때로는 아이가 어른들의 평범한 생각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특별한 발상과 자유로움이 무척 귀여웠다. 역시나 물어보니 가을의 대표적인 명절인 추석이 생각났고 친척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차례를 지냈던 즐거웠던 기억들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림에서 나무로 된 차례상 위, 지방에 추석이라고 적혀있었으며 양옆으로 촛불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제기에는 떡과 과일 등 차례에 올려진 음식들이 담긴 모습이었다.

아이가 어린 시절부터 미술 유치원을 다니며 다양한 표현활동을 즐거워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며 유아기 시기와 다르게 단체생활을 익히고 규율과 규칙을 학습하며 미술 역시 정해진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하고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시켰다. 입학 후, 처음으로 교내 미술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함께하는 가을 여행'이라는 주제를 선택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시간이 부족해 작품을 미완성으로 제출하고 말았다. 혹여 그림을 그리며 집중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장난을 친 것은 아닌지 부모로서 내심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열심히 했으나 시간이 부족했다고 한다. 그랬다면 괜찮았다. 아이는 아름다운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는 가족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단풍잎과 은행잎에는 잎맥을 빼곡하게 그렸으며 나무에는 나무 표피를 하나하나 묘사했다. 그림 속 인물에는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그려 넣은 매우 정교한 그림이었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림 속 카메라 화면에는 위의 모습들을 아주 작게 똑같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이의 이야기대로 시간이 부족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30여 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미술 시간에 민속촌을 여행한 경험화를 그리고 있었다. 한옥의 나뭇결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한복의 비단 무늬를 하나하나 그리고 있던 나에게 칭찬을 해 주시던 선생님이 기억이 났다. 모든 것을 정교하게 그리느라 항상 작품을 늦게 제출하여 비교적 꾸짖음을 들었던 적이 더 많았는데, 오히려 칭찬을 해주셨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불과 며칠 전의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다.

이후 그림을 배우고 미술을 전공하게 되면서 그 생각이 종종 난다. 다른 길을 갔더라도 지금처럼 평범하게 살았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따스했던 기억과 희망을 품고 사는 것과 그렇지 않은 삶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는 미술을 배우고 있다. 미술 선생님은 아이가 서툴지만 섬세하게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셨다. 수십 년 전의 그 선생님처럼.


이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

<저작권자 충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61건의 관련기사 더보기





충북일보 / 등록번호 : 충북 아00291 / 등록일 : 2023년 3월 20일 발행인 : (주)충북일보 연경환 / 편집인 : 함우석 / 발행일 : 2003년2월 21일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무심서로 715 전화 : 043-277-2114 팩스 : 043-277-0307
ⓒ충북일보(www.inews365.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by inews365.com,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