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의 꿈

2021.07.18 16:17:53

구본숙

미술평론가·수필가

주부로서 오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자신보다 가족을 위한 삶을 살게 됐다. 집에 홀로 있노라면 소박하게도 김치와 김, 밥 정도로 식사를 해결하곤 한다. 그러나 가족들을 위해서는 좋은 식재료를 사용해 국과 반찬 등을 정성과 시간을 들여 만든다. 옷이나 물건을 살 경우도 가족들의 것은 브랜드와 디자인을 신경 써서 고르지만 내 것은 아예 사지 않거나 혹은 취향과 디자인을 무시한 저렴한 것만 찾게 된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좋은 옷을 입거나 물건을 사용할 일이 적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주부들은 기본적으로 여러 부분에서 아끼며 살게 되는데 한편으로 가족들을 위해서는 최고로 해주고 싶은 마음 때문에 본인에 관련된 부분들을 특히 절약하게 된다.

비단 금전적인 부분만 아니라 자기계발도 마찬가지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삶의 기반을 다져왔다. 강사, 연구원으로서 직장생활을 했지만,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경력단절이 되고 말았다. 가까운 이들 가운데 여성으로서도 사회적으로 안정된 위치에서 일하는 사례도 많으나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은 경우가 다수였다. 행복한 가정과 자아실현의 기로에서 어떤 길이든 자의적인 선택이다.

다만 여성으로서 가정과 사회생활 두 가지 모두를 누리기 어렵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평범한 집안일이 계속되니 그렇게 열심히 살 필요가 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살림도 잘 꾸리며 경력을 이어나가겠다는 야무진 생각도 해 보지만 아이가 갑작스레 아프거나 피치 못할 일이 생겼을 때 상당히 난감할 것이다. 특히 육아에 관련된 부분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므로 아쉬움을 접는 하나의 요인이다.

살림과 육아도 의미 있지만, 경력단절이라는 불안과 지금까지 노력한 부분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아이를 건강하고 올바르게 키우는 것과 남편의 입신양명을 돕는 일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아이가 도움 없이 혼자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 자라고 남편도 자리 잡을 즈음 나도 언젠가 사회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나마 낮에는 집안일 이외의 여유 시간이 비교적 많기에 원하는 일들을 조금씩 하고 있다. 낮에 시간이 부족하면 밤에 아이를 재우고 미술에 관련된 작품활동과 글을 쓴다. 주부로서 반복된 생활에 지쳐갈 즈음 집안에서도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혼자서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에 작게나마 만족하고 막연하지만 언젠가 꿈을 이어나갈 수 있을 안도감을 느낀다.

가까운 주부들을 만나서 가끔 이야기를 듣노라면 그들도 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헌신하느라 자신을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가꿀 수 없었을 뿐이었다. 이웃의 주부는 나와 비슷한 차림새였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 좋은 옷을 사지만 정작 본인은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한눈에 봐도 낡아 보이는 반바지와 슬리퍼를 착용하고 있었다. 아이의 학비와 교육비는 아깝지 않지만, 자신이 무엇인가 배우고자 할 때 매우 망설여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특히 크게 공감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집안의 반대로 대학을 가지 못했지만 좋은 남편을 만나 서로 이해하고 사랑해서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대학 입학과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파트 벤치를 지날 때 소설책을 가끔 읽고 있는 그 주부의 모습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녀는 소설책을 구입하는 것조차 부담이 된다고 했다. 나는 가까운 도서관을 소개하며 데리고 갔다. 아주 가깝지는 않지만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구립 도서관이 있다. 어쨌든 뙤약볕을 맞으며 도서관을 갔다. 도서관에서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하는 그 주부를 보며 오랜 시간 갈망했던 소설가의 꿈을 깊이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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