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글쓰기

2021.09.23 15:42:09

불안증세와 수면장애가 있는 여성과 알고 지낸 바 있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말수는 적었다. 친분이 쌓이기까지 다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친분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했다.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믿은 만큼 현금으로 돈을 빌려줬고 받지 못했다고 했다. 도리어 자신에게 모욕감을 주며 인연을 끊고 말았다고 전했다.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돈을 빌려주기 위해 가족들에게도 누를 끼쳤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돈을 빌린 친구는 독실한 종교를 가진 유치원 교사로서 공무원의 자녀로서 마치 좋은 사람인 척 가면을 쓴 채 잘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불안증세와 수면장애를 앓게 된 계기였다. 빌려준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배신감과 인간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다. 현금으로 빌려주었기 때문에 증거가 남지 않아 소액 청구소송도 걸지 못했다고 한다. 돈을 빌리기에 앞서 증거인멸과 의절을 위한 친구의 표독스러운 계획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고전소설 '지킬박사와 하이드' 가 생각났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잔인함과 혐오, 교활함과 간사함을 모두 느꼈다고 하며 몸서리를 쳤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말수가 적은 그녀였기에 이러한 이야기를 꺼낸다는 자체가 아주 힘든 일임이 분명했다.

몇 년이 지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백화점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녀였다. 우연히 만나게 되어 한달음에 달려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녀도 반가워하며 그간의 소식을 전했다. 한층 밝아진 모습이었다. 그사이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을 했고 현재 임신 중이라 말했다. 좋은 소식을 듣고 덩달아 기뻤다. 불안증세와 수면장애도 이제 없어졌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그 이유는 본인의 부단한 노력에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분노와 경멸을 담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돈을 빌려 간 친구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써냈고, 한동안 그러한 글을 쓰고 읽어보기를 반복하니 의외로 마음의 위안이 됐다고 했다.

결혼 후에는 악담과 같은 글을 쓰지 않겠다는 다짐했다. 남편의 배려심으로 마음의 상처가 낫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후 자신에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상처받은 마음을 글로 표현하고자 한 목적이었으며 불안증세와 수면장애를 앓았던 기억을 섬세한 필치로 써 보았다. 한동안 내면의 글을 쓰고 읽어보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고통이 무척 컸으나 글을 쓸수록 고통이 무뎌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나 역시 글을 쓰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한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아기도 생겼으니 이제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제 그럴 것이라고 그녀는 웃으며 답한다. 글을 쓰며 마음이 단련되었으며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적정한 선을 지키는 법을 알게 되어 이제 상처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녀가 상처를 받았던 이유는 너무 여리고 사람을 믿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에서 기인 된 것이었다. 그것을 악하게 이용한 사람의 절대적인 잘못이었다.

오랜 시간 글을 꾸준히 쓴 노력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격렬한 발버둥이 진심으로 느껴졌다. 글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단단해진 그녀였다. 넓은 범주에서 그녀가 쓴 글은 수필에 해당한다. 수필에는 삶과 철학이 담겨있다. 그래서 수필을 '인간학'이라고도 한다.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이다. 글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서 시작된다. 점차 주위의 이야기로 넓혀져 상상에 이르는 글을 쓰기까지 끝이 없는 도전을 요구하며 사람과 사물을 꿰뚫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녀는 고통의 끝자락에 서 보았고 그것을 담은 글을 썼다. 수필은 작가만 쓰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으며 그것이 삶에서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면 수필가가 쓰는 글 이상의 가치 있는 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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