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수필과 함께하는 여름의 향기 - 수런거리는 뒤란

함기석의 생각하는 시

2020.07.09 15:52:35

문태준의 시는 따뜻하고 고요하고 울림이 깊다. 그는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이어가는 시인이다. 그는 자연의 풍경들을 넉넉한 품으로 포용하여 아늑하고 평화로운 서정으로 구현한다. 유년의 고향과 그 속에 깃든 삶과 죽음의 무늬들, 존재의 아픔들을 불교적 사유로 풀어낸다. 사물을 바라보는 세밀한 관찰력을 토대로 낮고 차분한 어조로 느림의 삶을 성찰하고 인생의 무상함과 생명에 관해 사색한다. 이를 통해 생명들이 생겨나서 성장하고 소멸하는 생의 여정이 수도(修道)의 길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꽃이 피고 꽃잎이 떨어지는 사이가 찰나(刹那)의 한 호흡임을 깨닫는다. 예순 갑자를 돌아 나온 아버지의 홍역 같은 삶도 한 호흡이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하루도 한 호흡이고, 개조개가 슬며시 발을 내밀었다 거두어가는 사이도 한 호흡이다. 즉 세계의 모든 존재의 일생이 한 호흡이고 찰나이자 무한이다. 시인은 이 무겁고도 장엄한 한 호흡을 묵언(·言)으로 견디려 한다. 이런 우주적 시간 인식이 시의 품을 넓게 하고 울림을 낳는다.

수런거리는 뒤란 - 문태준(文泰俊 1970~ )

산죽(山竹) 사이에 앉아 장닭이 웁니다

묵은 독에서 흘러나오는 그 소리 애처롭습니다

구들장 같은 구름들은 이 저녁 족보만큼 길고 두텁습니다

누가 바람을 빚어낼까요

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산죽의 뒷머리를 긁습니다

산죽도 내 마음도 소란해졌습니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둥글게 등이 굽어질까요

어둠이 흔들리는 댓잎 뒤꿈치에 별을 하나 박아주었습니다

꽃도 풀도 돌멩이도 동물도 사람도 이 묵언의 견딤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에 시인은 자연의 풍경들에게서 인간의 말로 기록할 수없는 장엄함과 숭고함을 느낀다. 그러기에 그에게 풍경은 세계의 비의를 사유케 하는 물음표이자 인간의 삶과 죽음을 성찰케 하는 느낌표다. 이런 풍경들 중에서도 시인은 유독 저녁의 풍경에 매혹된다. 하늘로부터 땅에 어둠이 내려앉는 순간 존재들은 자신의 형상을 어둠 속에 묻고 이때부터 어둠의 마술적 힘이 지상 가득 퍼져나가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 황혼이 깔리는 저녁은 존재의 형상 변화가 시작되는 시간대고 존재의 성찰이 이루어지는 시간대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직관과 통찰이 싹트는 시작점이고 망각되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부활점이다. 이 저녁의 시간에 시적 자아는 고요히 움직인다. 존재의 변화와 죽음을 사유하면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성찰하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이 느림의 미학은 맨발, 길, 연기, 흐르는 물 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문태준 시인을 떠올리면 창가에 고요히 앉아 뜰의 나무와 풀과 나비를 관조하는 모습, 저녁의 들길이나 산길을 천천히 걷는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걸음도 빨리 걷는 것이 아니라 아주 느리게 천천히 걷는 걸음이다. 그의 몸이 그러하듯 그의 시는 동세대 시인들의 속도감 높은 시들과는 색채와 무늬가 확연히 다르다. 그의 시는 멀게는 백석, 가깝게는 장석남과 혈연관계라 할 수 있다. 그는 유년의 풍경에 자주 사로잡히는데 그만큼 유년은 시인 자신의 살갗에 붙어있는 살아있는 시간이자 시세계의 근원적 출발지다. 이 유년을 대표하는 공간이 뒤란이다.

뒤란은 대체로 밝은 빛의 낮의 세계가 아니라 그늘의 드리워지는 저녁의 세계, 어둠이 밀려드는 밤의 세계로 그려진다. 자연현상의 비의와 침묵을 간직한 곳, 존재의 비극적 실상과 아픔을 간직한 공간이다. 슬픔과 기쁨, 아픔과 환희가 공존하는 원형적 공간이다. 이 뒤란이 좀 더 넓게 확장된 공간이 유년의 마을이다. 그의 시에서 유년의 마을이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곳, 주검을 실은 상여가 지나가는 곳, 무당의 마술적 힘이 지배하는 곳으로 그려지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이 마술적 힘이 서정적 이미지들과 결합하여 독특한 기억공간으로 재탄생하는데 흥미로운 건 죽음과 무당의 힘이 존재하는 그곳이 두려움의 공간이 아니라 무심한 풍경들의 사색공간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는 시인이 죽음을 삶의 일상의 하나로 간주하고 죽음에 대한 주관적 감정들을 몸 안으로 삼켜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를 삶과 죽음의 의미를 파헤치는 도구적 수단으로 전락시키지 않는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서정의 풍경들 속에 자유롭게 풀어놓음으로써 역으로 삶의 의미, 죽음의 비의, 존재의 기원 등을 사유한다.

「수런거리는 뒤란」은 시인의 첫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2000)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산죽(山竹) 사이에서 장닭이 애처롭게 우는 저녁 무렵, 하늘에 낮고 길게 깔린 구들장 같은 구름을 바라보며 시인은 무량한 시간의 흐름, 바람과 빛과 어둠의 근원에 대해 사색한다. 자연과 감각적으로 조응하면서 대답 없을 질문을 통해 시인 자신과 인간의 삶을 반추한다. 바람이 잦으면 산죽도 사람처럼 등이 둥글게 굽어질까, 이런 독백 투의 질문에는 생의 비애를 품어 안으려는 시인의 넓은 품이 드러난다. 캄캄한 밤, 어둠이 댓잎 뒤꿈치에 박아놓은 별이 반짝 하며 내게 눈짓하는 것만 같다.

함기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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