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

2025.06.08 16:26:42

이정희

수필가

우리 집 창문은 사계절을 스케치한다. 아지랑이 피어나는 봄과 가을의 단풍이든 한겨울 백설이든 보이는 대로 그린다. 그림 중에서도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이다. 무심코 바라보는데 창문만 한 크기에 하늘이 통짜로 새겨진다. 내 마음도 파랗게 물든다. 흰 구름도 성큼성큼 걸어오는 중이다. 한참 바라볼 때는 나까지 둥둥 떠오른다. 꽃처럼 피어나던 뭉게구름이 바람에 흩어진다. 어느새 산봉우리로 쑥쑥 자라더니 돛배처럼 떠간다.

날아가는 새를 턱 하니 그려 놓기도 한다. 금방 사라지기는 하지만 순간 포착을 보면 굉장한 실력이다. 공중의 새를 화살로 떨어뜨린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창문에 닿는 대로 자동 스케치 또한 쌍벽을 이룬다. 이따금 시냇물 소리까지 동반한다. 큰물이 지면 폭우와 함께 콸콸 내리구르는 아우성이 또렷하게 녹음된다. 며칠 후에는 수정같이 맑은 물소리가 창문을 타고 흘러내린다. 골짜기 돌 틈을 끼고 가던 진짜 시냇물처럼 그렇게.

해거름에는 노을이 뜨곤 했다. 뒤미처 밤이 되고 거기 뜬 별은 판화이다. 검은색 고무판에 사금파리 또는 유리 조각 모양의 홈을 파고 두꺼운 표지에 콕콕 찍어냈다. 밤하늘 정도 되는 먹지에 다문다문 별을 새겨놓기도 했다. 창문이 스케치하는, 그림도 아닌 그림을 보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길 건너 벽돌집도 통째로 들어온다. 가끔 그 집 아저씨가 나무를 다듬는 예초기 소리도 들린다. 동네 한복판 같으면 짜증이 나겠지만 빈터라서 시끄러운 줄 모르겠다. 뒷산 어름의 사래 긴 밭주인도 가끔 소독약을 치러 나온다. 참깨를 심은 듯 별초롱 같은 꽃이 피었다. 밭이 커서 한나절은 걸리는데도 풍경 때문인지 소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차들도 조용조용 지나간다. 풍경은 누구에게나 감동이었을 테니 경적 소리도 차마 조심스러웠겠지.

가끔 소리개인지 뭔지 커다란 새가 날아다녀도 스케치로 보일 뿐 가슴이 철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맴돌다가 병아리를 채간다는 얘기는 오래전부터 들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닭장에서 키우기 때문에 가당치 않다. 어쩌다 까옥까옥 갈 가마귀 소리도 아랫마을 살 때는 을씨년스럽더니 여기서는 동영상 효과로 그만이다.

창문을 격해서 보는 세상은 그렇게 특별했다. 지게문보다 작은 창문에서 두 개의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지금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은 훨씬 미화되지만, 창문이 덜컹거리는 날은 또 그런대로 아늑해진다. 풍경이 미화된다면 먹구름 끼는 날은 답답해야 될 텐데 그 때문에 또 다른 창의 이미지가 나온다. 눈보라 치는 밤일수록 방안은 더욱 따스해지는 것처럼 창문의 마력이다.

우리 살 동안도 좋은 관계는 물론이고, 어쩌다 삐걱댈지언정 자연스럽게 차단되는 시스템이면 좋겠다. 창의 이미지가 안팎으로 그렇게 선명한 것 또한 비치는 대로 스케치하기 때문일 거다. 좋은 풍경은 물론 언짢은 풍경도 가감 없이 수용한다. 나쁜 관계일지언정 적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

외출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커튼을 치고 현관을 나설 때도 파란 하늘이 발목을 잡곤 했다. 엊그제도 나들이옷을 갈아입은 뒤 문단속을 하고 나가려 했더니 갈수록 또렷해진다. 그러다가 바람에 흩어지기도 해서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종내 바뀌지를 않는다. 외출할 때마다 걱정 아닌 걱정에 시달릴 것 같은, 그 또한 행복의 목록에 적어두었다. 창문이 있는 한 내 마음도 똑같이 멋지고 예쁜 풍경으로 채워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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