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고 넓은 길

2025.05.29 14:58:10

조준호

수필가

'길'이라는 말은 짧지만 많은 뜻을 품고 있다. 산책길, 골목길, 찻길처럼 물리적인 길을 뜻하기도 하지만 인생의 방향을 가리키거나 사람 사이의 관계 거리 혹은 현재 자신의 위치와 처한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의 단어 안에 겹겹이 의미가 포개져 있을 때 그것을 다의어라 한다. 한글에는 이런 다의어가 유독 많다. 표음문자의 특성상 같은 소리와 글자에 여러 뜻이 실리는 경우가 흔하다. 다의어의 특성으로 단어는 같아도 뜻은 다를 수 있으며 같은 뜻이라도 청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이런 다의어의 특성은 문학작품에 빈번하게 나타나기도 하고 유머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같은 말을 다르게 이해하게 되어 발생하는 어긋남은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그 웃음은 종종 오해가 따라붙는 때도 있다. 다의성을 이용해 본심을 흐리기도 하고 자신의 입장을 애매하게 표현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방식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청자가 화자의 의도를 오해하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다의어는 풍부한 언어적 자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소통의 어려움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화자와 청자가 서로 주고받는 말의 의미가 향하는 방향은 듣는 이의 살아온 궤적에 따라 달라진다.

말이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벽이 되어 다가서지 못하게 하는 장막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길이 막혔다'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교통 체증을 뜻할 수도 있고, 인생의 고비를 나타낼 수도 있으며, 누군가와의 소통이 단절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말하는 이는 익숙한 표현으로 마음을 건넨다 해도, 듣는 이는 결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말로 소통을 하다가 각자 다른 방향의 샛길로 들어서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말은 단어로 이루어지지만, 의미는 문맥 속에서 비로소 선명해진다. 단어 하나로는 부족하다. 말하는 이의 숨결, 듣는 이의 삶의 여정이 더해져야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소통은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상대가 전하려는 맥락을 헤아리는 감각이다. 단어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저 말의 표면을 이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면까지 다다르기 위해선 화자의 표정과 목소리, 더 나아가 침묵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까지도 함께 읽어야 한다. 자신의 기준으로 단어를 해석하기보다 말하는 이가 담아낸 말의 본뜻을 먼저 헤아리려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화자 또한 책임을 피하거나 본질을 흐리기 위한 도구로 다의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성숙한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소통의 시작일지 모른다. 화자와 청자가 마음으로 듣고 서로 같은 길 위에 서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때 그 길은 막힘없이 이어지고 샛길도 없이 서로를 향해 열려 있는 곧고 넓은 소통의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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