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에 관하여

2025.05.21 14:08:42

이은일

음성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주인공 스티븐스가 집으로 들어온 새를 잡아 창문을 열고 하늘로 날려 보낸다. 새는 푸드덕거리다가 하늘 높이로 멀어져간다. 스티븐스는 한동안 새를 바라보다가 이내 창문을 굳게 닫으며 영화는 끝난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계속 생각한다. 그가 끝내 버리지 못하는 그 신념이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이번 달 독서 마무리는 색다르게 영화감상으로 계획을 짜봤다. 우리가 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동명의 영화를 함께 보기로 한 것이다. 책으로 읽은 후 영화까지 보고 나니 왠지 이번 책은 꼭꼭 씹어 영양분을 모두 흡수한 듯한 느낌이다. 그냥 영화만 봤다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어려웠을지 모르겠다. 원작과 다르게 각색된 부분을 발견하고 그 의도를 추측해보는 일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영국의 저명한 저택의 집사다. 그는 평생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충실하게 주인을 섬기며 살아왔다. 그것이 위대한 집사의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집사의 소임을 다한다는 명분 아래 캔턴 양에게 향하는 자신의 마음도 숨기고 아버지의 임종까지 지키지 못한다. 인간적으로 느끼는 감정들을 외면했던 자신의 행동은 신념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을 쇠뇌 시킨다. 그렇게 삶에서 지나쳐버리면 안 될 몇몇 순간을 안타깝게 놓쳐 버렸다.

그러다 인생 황혼기에 6일간의 생애 첫 여행을 떠난다. 여행길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곰곰이 회상하게 된다. 집사로서 평생을 충성을 다해 모셨던 훌륭한 주인이 사실은 열열한 나치 지지자였다는 진실 앞에 자기 책임은 없다고 애써 강조해보지만, 의심 없이 믿어왔던 신념에 한 가닥 의혹이 인다. 뒤늦게나마 용기 내어 찾아간 옛사랑 옆에도 이제 가족이 있다. 그는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심정으로 그녀를 떠나보낸다. 그리고 자신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집사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한다. 끝내 위대한 집사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못하는 주인공이 안타까웠다. 청소도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쓰러졌던 그의 아버지처럼.

작품해설에서 번역자는 나치 지지자 달링턴 경에 헌신한 스티븐스를 아이히만에 비유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냈던 아이히만은 그저 명령에 복종하고 근면 성실한 평범한 직장인이었음을 말한다. 성실하게 일상을 반복함으로써 악을 돕고 악에 이용당하는 범인들의 삶의 폐해를 언급하며, 스티븐스가 집사의 품위에 앞서 인간으로서의 품위에 대해 먼저 성찰했어야 한다고 했다.

신념이란 뭘까? 잘못된 신념은 또 어떨까?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확고한 신념에 따라 자신을 절제하는 삶은 어렵지만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라도 스티븐스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고민 없이 받아들이는 맹목적인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등골이 오싹해진다.

책 뒷부분에 저녁은 가장 좋은 때요, 하루 일을 끝냈으니 다리를 쭉 뻗고 즐기며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잘 활용해 보라는 말이 있다. 불빛이 켜지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창 가에서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티븐스의 마음도 조금 느긋해진 듯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위대한 집사를 꿈꾼다. 한술 더 떠 자기에게 부족한 농담이라는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역량을 바쳐 연습해보리라 다짐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났다. 신념이란 그런 건가 보다. 그래도 그의 삶은 여행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질 것 같다.

이제 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저녁은 가장 좋은 때요, 또 금방 어두워질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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