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달지다. 가난했던 시절 우리네 엄마들은 쌀독에 쌀이 차면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했다던가. 나야말로 한해 양식을 장만해 둔 농부처럼 뿌듯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알천 같은 알곡을 곡간 가득 차곡차곡 쌓아 놓고 몇 번이고 자꾸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몇 년 전부터 해가 바뀔 때마다 의식처럼 해오는 일이 하나 있다. 안방 책꽂이를 정리하는 일이 그것이다. 원래 텔레비전이 있던 자리였는데, 독서 모임을 시작해 매달 꾸준히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 텔레비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책꽂이를 갖다 놓았다. 그리곤 자칭 '내 영혼의 곳간'이라 부르며 해마다 독서 모임에서 1년 동안 읽을 책들을 거기에 꽂아놓는다.
독서 모임의 이름은 '함께성장읽기'다. 뜻이 맞는 지인들끼리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에 소개된 50권의 책들을 함께 읽어보자 해서 시작한 모임인데 올해로 5년째 이어오고 있다. 이미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책들도 많아 50권을 다 읽지는 못했고, 요즘엔 연말에 함께 의논하여 다음 해에 읽을 책들을 선정한다. 올해는 노벨문학상 수상작들을 읽어보기로 했다. 우리나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계기가 되었다. 우선 역대 수상작품 중에서 추천하고 상의하에 목록을 선정한 뒤 다달이 읽을 순서도 정했다.
책꽂이 정리를 할 때,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서 서재 방 책장으로 옮기는 작업에 더 비중을 두는 편이다. 그 과정이 실질적으로 내 영혼이 자라는 의미 있는 시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해 동안 읽어온 책들을 독서 노트와 함께 한 번씩 뒤적이다 보면 그 책을 읽고 난 직후보다 더 깊은 울림을 받을 때가 많다. 짬짬이 적바림해 둔 글감들을 정리하고 분류해서 저장해둔 폴더처럼, 그 울림들은 내가 앞으로 글을 쓸 때 필요할 적마다 꺼내 쓸 수 있는 든든한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지난해 연말 불어온 한강 작가의 소설 열풍에 편승해 <소년이 온다>를 읽고 있을 때, 믿어지지 않게도 잠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게다가 아들과 여행에서 돌아온 뒤 독감에 걸려 일주일을 심하게 앓고 난 후이기도 했었다. 그로 인해 심신이 매우 뒤숭숭한 상태였지만, 그런 중에도 차분히 영혼의 양식을 마련해 곳간을 채운 건 잘한 일 같다. 이런 때일수록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제 할 일 해주는 사람들이 꼭 필요한 거니까. 조용히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다. 9년 만에 출산율이 증가했다는 반가운 소식과 함께 가까운 시일 안에 우리 집에 첫 손주도 태어날 예정이다.
반나절을 꼬박 안방과 서재를 오가며 책 정리를 끝냈다. 시나브로 어둠이 내려앉은 책꽂이 앞에서 이제부터 맛있게 꼭꼭 씹어 먹을 영혼의 양식들을 바라본다. 이번 책들은 정말이지 제목만 봐도 배가 부르다. 비워졌다가 어느새 다시 새로운 책들로 채워진 저 자리가 어쩐지 화수분 같다는 생각이 든다. 퍼내면 다시 그득해지는 이런 영혼의 곳간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게 이토록 은밀한 기쁨인 것을 남들은 모를 것이다.
갑자기 이해인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어둠 속에서도 훤히 얼굴이 빛나고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한마디의 말 얼마나 놀랍고도 황홀한 고백인가.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나는 지금 책들과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