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시경루' 화암사 꽃비

2022.05.18 16:33:08

이재준

역사칼럼니스트

추사 김정희 선생은 제주도 귀양시절 61세에 고향 예산 화암사(華巖寺) 낙성 소식을 듣게 된다. 화암사는 바로 추사의 증조부인 영조의 사위 월성위 김한신(金漢藎. 1720 ~ 1758)이 중건한 절이다.

임금이 사위에게 내린 별사전 안에 있던 절이기 때문에 추사 가문은 이 절을 원찰(願刹)로 삼았다. 유학자로서 불교에 남달리 천착했던 추사에게 영향을 준 사찰이 바로 화암사다.

절에서는 추사에게 두 가지를 부탁했다. 상량문과 절 안에 지은 누각에 대한 현판을 써 달라는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요, 명필의 글씨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시경(詩境)'은 아름다운 곳 즉 시가 나올만한 경치를 지칭한다. 젊은 시절 부친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당대의 석학 옹방강선생을 만나고 그로부터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의 글씨 '시경(詩境)를 얻어 화암사 병풍바위에다 각자했다. 이에 연관을 지어 절에서는 건물을 지으면서 '시경루'라는 현판을 달고자 했던 것이다.

추사는 귀양지에서 부인의 죽음에 임종도 하지 못한 채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 화암사에서 시경루 현판 부탁을 받았다. 추사는 인편에 두 가지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화암사에 가면 당시 추사가 보낸 진묵 시경루(詩境樓) 현액은 없다. 추사 글씨를 갖고 나무에 각을 한 현판이 예산 고택 추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추사 글씨를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은 화암사를 찾아 진묵 보기를 희망해 왔다. 그러나 후대에 각자한 현판만을 보게 되어 실망하는 이들이 많았다.

시경루는 작은 현판이지만 추사가 써온 예서체중 가장 아름다운 글씨로 평가받는다. 추사는 예서를 '서법의 조가(祖家)'라고 했다. '만약 서도에 마음을 두고자 하면 예서를 몰라서는 안 된다'는 지론을 가지고 예서의 서법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추사가 추구한 예서세계는 서한(西漢)시대 비석의 방경(方勁 : 모나며 굳셈), 고졸(古拙 : 예스럽고 졸박함)의 구현이었다. 한 대의 수많은 명비(名碑) 탑본을 얻어 피나는 노력 끝에 최고의 예서를 쓰게 되었다.

필자는 최근 경남의 모 암자에서 한 스님이 소장하고 있는 묵적 한 점을 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묵적은 고색창연한 한지에 쓴 '시경루'였다. 왼쪽에는 추사의 방인(方印) 낙관이 두 개 찍히고 오른 쪽에는 전서(篆書) 두인(頭印)을 찍었다. 처음에는 난해하여 읽을 수 없었다, 필자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의 도움을 받아 두인을 해석하는데 성공했다. 추사가 직접 도장을 새겨 거꾸로 찍어 해석이 어려웠던 것이다.

두인은 바로 화암사의 정경을 시로 적은 듯한 송나라 말기 옹삼(翁森)의 시 '사시독서락(四時讀書樂)'에 나오는 '낙화수면개문장(落華水面皆文章)'이었다. '꽃이 떨어지니(꽃비) 모든 것이 시(문장)로다' 고향을 그리며 꽃비를 생각한 것인가. 필자는 추사의 가장 아름다운 예서 '시경루'를 진묵(眞墨)으로 고증하는 행운을 얻었다.

5월 중순 화암사 뜨락에는 아카시아 꽃비가 날리고 있다. 고사(古寺) 풍경의 그윽함에 한편의 시가 나올 법하다.

바다 건너 제주 천리 타향에서 현액을 써 보낸 추사의 심경은 어땠을까. 시경루 한 획 한 획에는 추사의 슬픈 마음이 표현 된 것만 같다. 추사의 오열이 묻은 유묵을 만져보니 필자도 숙연해 지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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