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좋다. 조금 이른 오전으로 나의 지져분한 옷차림을 보고 시비다.
"험한 일은 혼자 다 한 것 같애!"
나는 그 말의 뜻을 알아듣고 파안대소했다. 남편하고는 일(業)하는 스타일이 다르고 맡겨진 일도 다르다. 나는 조그마한 마당과 작은 정원을 꾸민다. 100여 종의 식물군이 계절에 맞게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나의 삶에 활기를 불어 넣는다. 작지만 여느 넓은 정원처럼 정원지기로 역할은 매일 같다. 잡초를 솎아내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으로 기쁨을 주었던 아가들이 다음을 기약하며 뒤로 물러난다. 그 자리를 단정하게 정리를 해주어야 보기 흉한 모습이 연출되지 않기에 계속되는 돌봄이다.
'타샤의 정원'으로 유명한 타샤 튜더는 미국인이며 동화 작가, 삽화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는 50대에 이르러서야 村에 30만평의 광활한 大地에 천상의 화원을 일구며 사망(93歲)하는 날까지 전원생활을 즐겼다.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며 시골살이와 정원살이, 홀로살이에서 보여지는 여유로움으로 자연주의적 삶을 실천하였다. 그녀는 '인생은 짧으니 오롯이 즐겨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꽃들이 주는 화사함과 정원을 가꾸는 즐거움으로 보상 받으며 인생을 유유자적하는 삶이었다. 그녀의 <행복한사람, 타샤튜더> 자전적 에세이를 오래전에 접한 후 그녀의 삶을 동경하며 나의 정원을 꿈꾸게 되었다. 평생의 소원으로 내가 꾸미는 마법의 세계로 동화같은 사계절이 변화하는 과정을 온몸으로 체득하고 싶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비생산적인 일로 간주하는 사람이 있다. 즉 수확의 결과물을 중요시했다. 어느날 남편은 상추와 브로콜리를 심었다.
"브로콜리를 왜 이렇게 많이 심어?"
나의 물음에 "며느리 다이어트 한다니까!"
출산 후 체중 증가로 고민이 많은 며느리는 여러번 다이어트에 도전했으나 번번히 실패를 하였다. 작년에는 다이어트 식품인 고구마를 전부 아들네로 보냈었다. 나는 남편의 말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로 이러한 시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며느리가 더 노력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남편하고 나는 작업하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서로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는다. 나의 경우에는 일을 하려면 작업복으로 환복하고 그냥 편하게 바닥에 주저앉는다. 무릎 관절이 염려되기도 하고 잔디로 덮여있기에 나름 깨끗하게 보여 가능하다. 가끔 농사용 의자에 앉을 때도 있으나 엉덩이에 걸치는 과정이 까다롭고 복잡해서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 결과 엉덩이에 흙을 묻히기는 하지만 툭툭 털면 흙먼지가 바람따라 저멀리 떠나가기에 편하다. 비가 온 뒤로는 사정이 다르기는 하다. 이때는 엉덩이가 흙범벅이가 되고 작업복은 바로 세탁기 안으로 넣을 수 없다. 애벌빨래는 필수다.
반면 남편의 작업하는 모습을 보면 밀레의 그림이 생각난다. 19세기 프랑스의 화가로 '밀레의 만종'으로 유명하다. 작품중에 <이삭 줍는 여인들>이 있다. 여인들이 떨어진 이삭을 줍는 모습으로 그 모습과 흡사하다. 몸을 반으로 구부려서 어린 모중을 심는 행위는 허리에 큰 무리를 준다. 작업의 진척도 더딜 뿐 아니라 허리통증이 몰려와 비효율적이다. 여인들이 이삭을 줍는 모습은 전반적으로 모든 농민들이 가난한 소작농이였기에 늘 배고픔에 시달렸던 시대였다. 떨어진 이삭이지만 '티끌모아 태산' 이라고 살림에 보탬이 됐으리라. 허나 남편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단지 흙이 몸에 닿는 것이 싫어서이다. 또는 두 손을 이용해 물건을 들어 올릴 때도 나하고는 천양지차다. 나는 배(腹)에 바짝 붙인다. 허리를 보호하면서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법이다. 하지만 남편은 배에서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져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한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작업에 임하는 이유는 어이없게도 옷에 흙이 묻는 걸 질색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작업복을 따로 갖출 필요가 없다. 다만 작업화로 장화를 바꿔 신을 뿐이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한다. 성향과 자라온 환경의 괴리감, 다양한 사회의 경험 등으로 우리는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서로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각자 우주의 기운을 받더라도 표출하는 방법이 다르다. 우주의 원(圓) 안에서 두가지 음양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서로 대립하는 듯 하지만 결국에는 교감하면서 지향하는 목적은 같다. 우리는 대자연에 속하는 하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