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지금,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이 새벽 창문을 여는 순간 도착했다. 질문을 받고 국화차를 마시며 필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존재함은 무엇인가. 단지 숨 쉬고, 움직이고, 말하고, 일하고, 잠드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순간에 나 자신을 자각하는 것, "지금 이곳에 있다"는 깨달음 속에 존재는 비로소 태어나는 것 아닐까.
점심 무렵, 아내와 산책을 나섰다. 좁은 밭둑길 위로 보라색 갈퀴나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야생 꽃들은, 아무도 돌보지 않았음에도 시간을 잊지 않고 피어났다. 그것은 누가 허락해서, 누가 필요로 해서도 아닌, 존재 자체 의지였다. 보이지 않는 어떤 질서 안에서, 그들은 제 때 피었고, 제 방식대로 흔들렸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내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꽃이 아닌 시간을 바라보았다. 작은 꽃잎 속에서 꽃이 아내에게 말하고 있었다. "너도 피어라. 지금 네 이름으로."
산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제까지 앓던 감기는 온데간데없고, 익숙한 리듬으로 그녀 손길이 집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윽고 내온 참치김치찌개 국물이 입안에 퍼질 때, 필자는 문득 이 국물, 이 온기는 살아 있음에 대한 존재 증거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맛을 느끼고, 냄새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말 한마디를 주고받는 순간은 존재함에 대한 충만함이다.
한 주가 시작되고 출근길에 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고개를 숙인 채 속에 빠져 있었다. 고립된 자아에 스스로 빠져 서로 보지 않기 위해 애쓰는 듯했다. 존재하지만, 동시에 단절되어 있는 모습, 외부 세계로부터 단절되고, 자신으로부터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음이 눈에 들어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공사장 너머로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장미 계절은 분명히 왔지만, 그 꽃을 보는 내가 없으면, 그것은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더라도 살아 있다는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출근하여, 연차 신청을 끝내고 아내에게 장미 축제에 가자고 메시지를 보냈고, 그녀는 곧장 "좋아"라고 답했다. 소풍을 앞둔 학생처럼 마음이 들뜬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정해진 틀 안에서 움직였다. 출근, 퇴근, 집안일, 반복되는 루틴, 그 사이로 흘러가는 계절,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놓치고 있었고, 흘려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퇴근하여 흘러간 시간을 반추해 봤다. 꽃, 찌개, 지하철, 장미 축제 약속. 이 모든 것은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그 안에는 어떤 존재에 대한 무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세계를 바라보는 순간, 세계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 존재한다.
순환하는 계절은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감각에 대한 회복이고, 재개되는 인식에 대한 창이며, '지금 여기' 살아있음을 스스로 묻는 의미 있는 시간이다.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우리를 깨운다. "잠에서 깨어나라", "체온을 다시 느껴라", "당신이 주인 되는 시간을 살아라" 우리는 오늘도 밝아오고 지는 흐름 속에서 의미를 알아가고 만들며 살아간다.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느 철학자가 말했듯 '있음' 상태만이 아니다. 오히려 존재는 묻는다. "나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은 항상 시간 안에서, 순간 안에서, 구체적인 삶 안에서 주어진다.
밤이 지나면, 새벽은 찾아와 문을 두드릴 것이다. 필자와 아내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꽃을 보러 나갈 것이다. 우리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살아 있는 것. 살아라. 지금 이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