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 학생들을 만날 때면 늘 설렌다. 좋은 인연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대상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하고자 강의 첫 시간에 수강생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보라고 한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들은 서로 의아해하며 천천히 일어선다. 그때 학생들에게 한 학기 동안 여러분들의 무게를 감당해 줄 의자에 감사의 인사를 해보라고 한다. 그러면 그들은 미소 띤 얼굴로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의자야! 고마워~"라는 말을 하며 앉는다. 자기를 위해 헌신하는, '의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학생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무생물인 의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면, 자연스레 생명이 있는 대상에 대해 좀 더 소중함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이정록의 시 <의자> 는 이러한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의자'에 대해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라고 노래하고 있다.
어머니의 오랜 연륜에서 나온, 삶의 지혜가 듬뿍 담겨 있는 시이다. 허리가 불편하여 병원에 갈 준비를 한 어머니는 한 마디 하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라고 말이다. 허리에 통증을 느끼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의자'로 보인 것이다. "꽃도 열매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으로, 참외밭의 지푸라기와 호박의 똬리도 의자로 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 이르러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것이 결국 "그늘 좋고 풍경 좋은" 곳에 "의자 몇 개 내놓은" 것이라고 한 어머니의 말에서는 일종의 경구(警句)를 느끼게 된다. 의자가 단순한 의자에 그치지 않고, 어떤 대상을 존재하게 하거나 돋보이게 하는 매우 중요한 대상으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이 시에서의 '의자'처럼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대상들이 참으로 많다. 이 대상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으로 인해 좀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유지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러한 '보이지 않는 헌신'이 당연하거나 작고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헌신을 망각하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어느 시인은 이렇듯 누군가를 위해 세상 곳곳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시인'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전문
이 또한 이정록의 <의자> 와 함께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시이다. 자신을 지금까지 있게 해준, 도움을 많이 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시인은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시가 뭐냐고" 묻는 말에 "시인이 못 되므로" 잘 모른다고 겸손하게 답한다. 그는 무교동과 종로, 명동과 남산 등을 거닐며 그 물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다. 그러다가 저녁 때 남대문시장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깨닫게 된다.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다름 아닌 '시인'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새벽부터 나와 손님들에게 물건을 팔기 위해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한, 마음이 좋고 인정이 많은 시장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시인임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지금 여기'에서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순하고 명랑하고 마음이 좋고 인정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름 아닌 '시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새해에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소임을 묵묵히 해내는, 자기 일에 정성을 다하는 소중한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