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대전에 사는 김명수(金明洙) 시인께서 책을 한 권 보내주셨다. 나태주 시인의 매제이자 시인인 김동현(1944~2013)의 시집을 묶은 『김동현 시전집』이었다. 그는 충남 서산 안면도 출신으로, 1977년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후 세 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러나 그는 독자들에게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것은 아마도 그가 시를 쓰는 일 외에 인권변호사 등 다양한 활동을 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시를 보며 눈길을 끈 것은 내가 머무르고 있는, 제천과 연고가 있다는 점이다.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그는 중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1976년에 제천고등학교에 부임하면서 제천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는 청정 지역인 제천에 거주하며 공주사범 시절 나태주 시인과 시 쓰기에 열중하던, 시적 열정을 쏟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듬해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겨울 과수밭에서」로 당선하게 된다.(당시 이름은 김기종, 이후 김동현으로 개명)
겨울 과수밭에서/ 고요히 흐르는 해류(海流)가 있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빈 나뭇가지는 해초같이 떠서 흐른다.// 이제 비로소 모든 것을 버림으로 해서 얻은 자유./ 가만히 귀 기울이면/ 가라앉은 바다의 허밍 코러스.// 눈물겨운 가을 햇빛 속에 지탱해 오던 풍만한 보람의 과일은/ 이 수심(水深) 모를 공허를 위한 예비.// 밤으로 쓸쓸한 혼들이 모여/ 산호수(珊瑚樹) 사이 인어(人魚)들이 해류에/ 머리를 행구듯,/ 이 고요하고 슬플 것 하나 없는/ 허무에 머리를 감는다.// 아직도 기다림이 남은 이여,/ 봄 여름의 푸르던 여운도 다 지워지고/ 일렁이는 바다의 울음도 다 삭아서/ 맑은 공허만이 남아 있는/ 이 태고같은 수심에/ 너의 마음을 누이렴.
당시 그가 근무하던 제천고 주위에는 과수원이 많았다고 한다. 시인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창밖으로 보이는 과실수에 핀 꽃들과 주렁주렁 과일이 매달린 풍경, 그리고 과일을 수확한 후 텅 비어 있는 과수원의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특히 겨울 과수밭의 풍경에 주목하였을 터, 그는 이 풍경을 텅 비어 있는 쓸쓸한 모습보다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 해서 얻은 자유"로운 모습으로 본 것이다. "봄 여름의 푸르던 여운"도, "일렁이는 바다의 울음"도 지워지고 사라진, "맑은 공허"의 느낌을 운치 있게 살려내고 있다. 이 외에 제천의 지명인 '청전리'에 관한 시도 있다. "하늘의 별 사이에선 듯/ 한 잎씩 눈이 내린다.// 아마 어상천(漁上川) 댁 새끼돼지 한 마리가/ 부시시 일어나/ 눈발 날리는 하늘을 쳐다보리라.// 술 배달하는 현(賢)이 아빠도 밤 늦게 들어오시면/ 창문마다 불이 꺼지고/ 이 언덕 마을은 어둠 속에 가물가물 가라앉는다."(「청전리(靑田里)」)라고 하여 어상천 댁 새끼돼지와 술 배달하는 현이 아빠 등이 등장하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청전리(현 청전동)의 겨울 풍경이 그려져 있다.
1977년에는 그의 첫 시집 『겨울 과수밭에서』(시문학사)가 출간되어 의림지 솔밭에서 신경림, 나태주, 민영 시인 등 20여 명이 참석한 출판기념회가 열리기도 했다. 이 시기 제천의 문인들과 교유하며 제천문학회의 활동도 적극적으로 하게 된다.
자신의 꿈을 찾아 끊임없이 보헤미안의 길을 걸은 그는 우리에게 잊힌 시인이다. 그의 삶과 문학을 엿볼 수 있는 『김동현 시전집』이 발간되었으니, 그의 시에 대한 올바른 재조명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