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가 살았던 집(왼쪽)과 도쿄에서 가져온 이토 히로부미 별장. 내부는 전시장으로 사용한다.
야마구치현 하기에 메이지헌법 제정을 주관한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 있다. 요시다 쇼인의 신사 근처이다. 동상 모습은 그리 볼품이 없지만 오래된 외투에서 메이지 원훈의 모습이 배어나온다. 쇼인의 학동 가운데 가장 어렸던 이토 히로부미는 과격했던 선생의 가르침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다. 그래서 이 두 인물은 따로 떼어낼 수 없는 모양이다.
동상 바로 옆 건물이 이토 히로부미의 고택이고, 그 다음이 별장 건물이다. 별장은 1907년에 지은 것이라고 하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주인장이 죽은 모양이다. 도쿄에 있던 것을 2001년에 옮겨왔다고 하는데 방안에는 메이지천황의 하사품과 많은 사진을 전시해서 방문객이 그의 생애를 기리도록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동상(왼쪽)과 사진을 함께 찍은 영친왕과 이토 히로부미.
한국에서 가장 지명도가 높은 일본인을 찾으라고 한다면 단연 이토 히로부미가 될 것이다. 역사교과서에서 안중근 의사를 배울 때 꼭 나오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일제 침략의 상징이 곧 그였다.
초대 한국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이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자 혹독하게 핍박하였다. 대한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퇴위시킨 후 철저히 감시해서 손발을 묶어놓았다. 그런 뒤 사랑했던 막내아들인 영친왕을 일본으로 데려갔다. 인질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어린 영친왕과 같이 찍은 1907년의 사진을 보면 전율이 온다. 병정처럼 차린 10세 소년 영친왕 옆에 군복을 입고 칼을 찬 노회한 이토 히로부미가 서있다. 산채로 먹이를 잡은 의기양양한 늑대의 화상으로.
■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헌법
'사진으로 본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 안내판.
메이지헌법은 준비 단계부터 이토 히로부미가 참여하였다. 1882년에 메이지정부의 명을 받고 유럽에 가서 도이치 헌법을 배워왔다. 일본의 역사와 전통에 맞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초대내각의 총리가 된 후에는 본격적으로 각 조문을 작성해서 검토했고, 천황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을 설치한 후에는 스스로 의장이 되어 헌법초안을 심의하였다.
1889년에 드디어 메이지헌법이 공포된다. 이때 「제국헌법의해(帝國憲法義解)」라는 해설서를 같이 펴내서 그 구성과 특징을 널리 알렸다. 헌법의 핵심인 천황 관련 조항도 황실전범 해설서를 펴내서 논란을 막았다. 바로 여기에 이토 히로부미의 꾀가 집약되어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미 메이지정권의 원로였다. 만 27세에 임명직인 효고현 지사가 된 이후 공부경, 내무경, 궁내경을 역임하고 1885년 12월 초대내각부터 1901년까지 4회에 걸쳐 8년 여 동안 총리를 지냈다. 1890년에는 상원격인 귀족원의 초대의장이 된다. 그의 헌법 해설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메이지헌법은 "천황은 국가의 원수로서 통치권을 총람한다"고 규정했다. 제국의회는 천황의 입법자문기관에 불과했다. 법안제출권과 예산동의권은 있었으나 주권을 가진 천황이 재가해야 효력이 발생했다. 입법권이 그러하니 행정권과 사법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래도 그런 부문은 민간 정치가가 간여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군대는 통제가 불가능하였다.
군 통수권자는 천황이었다. 하지만 실제는 군부가 전권을 가졌고 의회와 정부에 전혀 책임을 지지 않았다. 더욱이 육군대신이나 해군대신은 현역 군인으로 임명되어 군 예산이나 병력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군 작전도 군부 마음대로이니 전쟁 여부도 군부의 결정에 따를 뿐이었다. 이것이 비극이었다.
■ 군국주의의 길로 나아가다
천황의 통수권은 허상이었다. 궁궐 속에서 차단된 채 군대 인사와 작전을 지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구 사단을 증설하고 예산을 증액시켜도 말릴 수가 없었다.
막부를 쓰러뜨린 뒤 그를 대신한 정권 담당자는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신흥 세력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들이 중심인 군부가 대대로 실권을 장악하는 방법을 헌법에서 찾았다. 청국과 러시아에 승리한 전쟁까지 일본 국민은 그 실체를 잘 모르면서 부화뇌동하였다. 그것이 '밝은 메이지'였다.
1926년 5월에 황태자(쇼와)가 방문했다고 돌비에 새겨놨다.
그러면 군국주의로 나간 '어두운 쇼와'는 무엇인가· 그것은 메이지의 연속일 뿐이었다. 일제 말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는 평지에서 돌출한 것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가 장난한 메이지헌법에서 나온 존재였다. 도조 히데키는 2차대전 막판에 총리와 육군대신 그리고 참모총장 3직을 겸직해서 천황의 통수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가졌다. 그래서 도조막부라는 말까지 들었다.
이처럼 실권을 장악한 세력은 유사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겉으로는 요란하게 메이지천황을 떠받들었지만 군 지휘권과 같은 실권을 가진 존재는 따로 있었다. 메이지나 쇼와나 인질로 잡혀간 영친왕과 무엇이 크게 달랐을까 싶다. 이제 천황이란 인질이 필요한 세력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