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도 속의 영동 한천서원, 왜 과장됐을까

2016.11.29 10:44:22

조혁연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조선시대 수령(守令)은 국왕의 대리 통치자로, 그 이름은 군수(郡守)와 현령(縣令)에서 한 글자씩 따왔다. 수령이 지방 임지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받는 것은 해당 고을의 인문과 자연지리가 담겨진 지도였다.

조선후기에는 방안식과 회화식 등 크게 2종류의 지도가 발달하였다. 전자를 대표하는 것은 잘 알려진 <대동여지도>로,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에 비해 후자는 정확도가 다소 뒤떨어지나 고을 전체를 1쪽의 그림지도로 볼 수 있는 강점이 있다.

회화식 지도를 그리는 데는 지방 화원이 주로 동원되었다. 이들은 지도를 정확히 그리지는 못했으나, 실경 산수화에 익숙한 솜씨를 살려 고을 전체의 경관과 인문적 이미지를 잘 묘사하였다.

영동권 황간면 한천팔경을 찾으면 "이런 곳에 감입곡류(嵌入曲流)의 비경이 숨겨져 있다니"라며 놀라게 된다. 그러나 한천팔경은 조선시대~일제 강정기 고지도에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한다. 한천팔경을 묘사한 조선시대 고지도로는 <광여도>(조선후기), <1872년황간현지도>(1872), <여지도>(조선후기), <지승>(조선후기), <해동지도>(조선후기), <조선5만분1지도>(1923) 등이 있다.

'광여도'의 한천서원 모습.

이들 고지도가 한천팔경 8개 지명을 모두 표기한 것은 아니다. <광여도>·<여지도>·<지승>·<해동지도>는 월류봉과 용연대, <1872년황간현지도>는 월류봉과 사군봉, <조선5만분1지도>는 월류봉만을 표기하였다.

이것은 한천팔경이 어떤 계기로 정해졌으나 일대를 주로 월류봉으로 호칭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광여도>, <여지도>, <지승>, <해동지도> 등 4개 고지도가 공통적으로 한천팔경의 중심공간에 그린 것은 한천서원(寒泉書院)이다. 고지도 속의 한천서원은 지금의 한천정사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 고지도는 한천서원의 경승성(景勝性)을 강조하기 위해 서원이 마치 깎아지른 절벽 위해 위치하는 것처럼 실경보다 과장되게 그렸다. 뿐만 아니라 주산에서 뻗어 내린 산세(山勢)와 수태극(水太極·回龍)이 만나는 혈(穴) 자리에 한천서원을 그리는 등 풍수지리를 크게 의식하였다.

한천팔경 과장성은 <광여도>에서 가장 두르러진다. 지금의 한천팔경은 들과 하천으로 에워싸여 있어 산세와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광여도>의 한천서원은 마치 '용발톱(산세) 끝의 천애절벽'에 위치하고 있다.(지도 참조)

한천서원에 대한 이같은 풍수적 과장성은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과 관련이 깊다. 효종과 우암은 병자호란 치욕에 대한 복수로 북벌을 공통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 큰 차이점을 보여 효종은 실제 군사적인 북벌, 우암은 관념적 비군사적 북벌을 생각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효종이 급서하자 우암은 30대 초반의 나이에 월유봉이 있는 한천정사로 낙향, 세월을 낚시질하였다. 왜 우암이 이곳을 낙향처로 택했는지는 '풍광이 너무 빼어나서' 외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단양군수를 지낸 황준량이 「유냉천정(遊冷泉亭)」이라는 한시를 지었다.

'소매 속에 가학루만을 휴대하다가(袖裏全携駕鶴樓) / 취흥에 다시 냉천정을 유람하였네(餘O又作冷泉遊) / 석양에 머리 돌리니 뜻이 끝없는데(斜陽回首無窮意) / 함께 봉우리에 드는 가을 젓대 소리(倂入峯頭一笛秋)-<금계집>

가학루는 학이 날개를 편 모습으로 지금도 추풍령 북쪽 사면인 황간면에 위치하고 있다.

/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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