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역사(海東繹史)'와 '임하필기(林下筆記)'는 '문장대에 있는 가마솥 같은 돌 웅덩이에서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데 비가 오거나 가물어도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그 중 한 갈래가 서북으로 흘러 달내가 된다.'고 전한다.
충북의 강 '달내'의 어원에 대해 그간 전문가든 지자체든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온천개발과 댐건설로 위협받고 있는 '달내'에 대한 한자와 한글표현은 다양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엔 '達川·獺川달천, 德川덕천'이 '임하필기'엔 '(나무목변에 통달할 달)川, 達川江'이, 유성룡의 서애집과 다산시문집, 연려실기술엔 '(나무목변에 통달할 달)川'이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표기가 있고, 정조와 순조실록은 '撻川'으로 기록했다.
이런 다양한 표기는 어느 것이 맞고 틀린 것이 아니라 이두식 음차자(音借字)다.
지명학자 도수희ㆍ배우리선생은 '달達' 은 고구려어로 신라 경덕왕이후 '山, 高'로 변화되었다고 하면서 '식달息達(평남중화) 〉土山, 달홀達忽 〉高城(강원고성)' 등을 제시한다.
아사달과 박달산도 좋은 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조선 중종25년(1531)에 간행된 '동람도'엔 달내를 '山川'으로 기록했다.
고서 50종을 조사해 본 바 '달'에 대한 한자표기는 수달을 뜻하는'(손수변에 통달할 달)·獺'이, '達'보다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조선지지자료 필사본, 최근지 충주, 충주발전사, 충주관찰사, 오군산업소개지, 충청북도요람'과 정부수립 후 출판된 '예성춘추, 충청북도 지명지'엔 '達川'으로 표기됐다.
따라서 행정용어로 고착된 '達川'은 일제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한자표기가 '達川'으로 고정됐으나 '디지털충주문화대전'에 '달천獺川·達川, 달래강,덕천德川,감천甘川,단냇물,달강,달천강'이란 기록을 남긴 것은 다행이다.
다양한 표현을 수록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을 이어받는 것으로 지역정체성을 지키는 핵이다.
다만 '조선지지필사본'조차도 채록한 '달ㄴ.ㅣ (아래아 사용한 내)'를 누락시킨 것은 아쉽다.
이와는 달리 '조선지지자료 필사본'과 '괴산군지'는 달내의 상류인 화양동계곡을 '거무내, 가무내, 금우내'로 전한다.
또한 무학대사가 아홉 구멍 난 바위를 보고 아홉 번 춤췄다는 '구무정'과 곰이 다녔다는 '곰내미골'도 채록했다.
한편 삼국사기 지리지와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는 물론 현재도 쓰는 '감물, 금평, 금사담, 금단산, 가마뿔소'란 지명도 있다.
이것을 일률적으로 해석하긴 이르다. 하지만 '甘勿'의 원뜻은 '거무, 그무, 가무, 가미(神), 곰·구마(熊), 감·검(神,君)' 등 '곰토템'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달達·단丹내' 관련어는 충주에, '검玄·감甘내'는 괴산에 분포해 있다.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달천수와 삼파수를 조선 최고의 물로 평했고 이여송 휘하 장수가 물맛이 좋다고 해 그후 '감물'이 되었다는 說로 볼 때 달내와 감물에 '달다'란 뜻이 모두 투영됐다고 봐야 한다.
신(新)의 물 달내는 그저 먹고 씻는 물이 아니다.
달내의 발원지인 속리산 경업대로부터 충주 삼초대까지 임경업 장군의 얼이 서린 '임장군의 강'이며 우본, 신립, 김시민, 송시열, 김홍도, 정약용, 홍명희, 반기문의 얼이 서려 있다.
호서의 혼과 생명이 숨 쉬는 이곳을 깨닫고 지키고 전하는 것은 당연히 후손들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