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룡
충북여성재단 위촉 양성평등교육 전문강사/화담성문화연구소 대표
2016년 1월 31일 방영된 SBS스페셜 422회의 한 장면이 기억난다. 한 남자아이가 거실에 누워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TV를 보고 있다.
주방에서는 엄마가 아침을 준비하고 여동생이 상을 차린다. 그 아이는 밥을 먹고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이렇게 말한다.
"아빠가 집에 없을 땐 내가 왕이에요"
2023년, 모 고등학교에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진행하던 중에는 한 남학생 반의 급훈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미래의 아내 얼굴이 달라진다" 언뜻 농담처럼 보일 수 있는 문장이지만, 그 이면에는 '좋은 학벌과 사회적 성공을 통해 더 아름다운 여성을 배우자로 선택할 수 있다'는 외모 중심의 성차별적 사고와 성역할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남성이 '왕'이자 '가장'이 돼야 한다는 인식을 강화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를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다.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남성이라면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는 나에게 '가장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래서 나는 강해야 했고, 성공해야 했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나는 아파도 말하지 않고, 힘들어도 쉬지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삶의 방식은 많은 남성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2023년 충북의 자살사망률은 28.6명으로, 충남에 이어 전국 2위를 기록했다. 이는 OECD 평균의 2.7배에 달하는 수치다. 특히 남성 자살률은 여성보다 2.2배 높았고, 경제활동 인구인 20~64세 남성의 자살률은 전년 대비 30.6% 증가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만 설명할 수 없다.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단절,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문화 등 그 뒤 뒤편에는 '가장'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있다.
이제는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 바뀌어야 한다. 아프면 말할 수 있고, 힘들면 쉴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할 수 있고, 울고 싶으면 울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나는 '가장'이 아니라, 가족의 한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고 싶다.
맞벌이든 홑벌이든 관계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자녀 돌봄과 교육에 가정과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사회, 개인의 책임만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 성별에 관계없이 각자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나는 그 해답을 '양성평등'에서 찾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한 답이기도 하다.
양성평등교육은 우리 사회가 당연하게 여겨온 가장의 역할을 되짚고,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자는 실천이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부여된 억압적인 역할을 내려놓고, 각자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책임, 희생, 침묵, 강인함,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을 때 삶은 균형을 잃고 개인은 보이지 않게 된다.
양성평등교육은 그 무게를 나누고, 역할을 함께 짊어질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인식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