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하우스 정대진 대표.
강원도 양구 출신의 정 대표는 일찍이 직업 군인에 눈을 떠 1994년 진주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당시 공군기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3년 뒤 하사로 임관, 청주 17전투비행단에서 12년 간 폭발물처리요원으로 근무한 뒤 31살 때 중사 전역했다.
일반인들에겐 폭발물처리요원이 어떤 직업인지 감이 잘 오지 않을 수 있을텐데, 한 마디로 얘기해서 '엄청나게 위험한' 직업이다.
EOD(explosive ordnance disposal)라고도 불리는 폭발물처리팀은 3천여종에 달하는 폭발물을 언제, 어디서든 안전하게 해체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항공 불발탄에서부터 설치 방식도, 해체 방식도 알 수 없는 국제 테러범의 폭발물까지 신속·정확하게 제거해야 한다.
누구나 한 번쯤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빨간선, 파란선 중 어떤 선을 잘라야 할지…. 단 한 순간의 선택에 수백, 수천의 목숨이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 덜덜 거리는 손으로 폭발물 제거에 성공한 뒤 땀범벅이 돼 그 자리에 주저 않는 주인공.
우리들이 스크린에서 혹은 안방에서 스릴 있게 보던 이 장면을 정 대표는 12년 간 묵묵히 수행해왔다. 그는 목숨까지 내놓고 하는 이 임무를 '천직'이라 생각했었다.
◇한복 디자이너로서의 인생 2막
하루하루가 액션영화 같던 그의 삶은 전역과 동시에 180도 바뀌었다. 직업 군인을 천직이라 여겼지만 이런 저런 사정이 생겨 부득이 전역을 하게 됐다.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떠오르는 건 평소 관심 있던 '의류 디자인' 뿐이었다.
청주 서문동 한복 거리에 위치한 실크하우스 매장 모습.
퇴직금을 몽땅 털었다. 1년 정도 한복업체를 쫓아다니며 기술을 익힌 뒤 2008년 청주 서문동 한복거리에 지금의 실크하우스를 오픈했다. 그 때만해도 전통한복을 제작·판매하는 일반사업자였다.
시장은 생각보다 더 좁았다. 전통한복을 찾는 사람들이 갈수록 줄어들었을 뿐더러 그마저도 결혼식·명절 때 반짝이었다. 이대로 가단 퇴직금만 홀랑 날릴 것 같았다.
실크하우스 제품 사진들.
생각을 바꿨다. 주 타깃을 생활한복으로 틀었다. 고름과 대님을 지퍼나 단추로 바꾸던 과거의 개량한복 수준을 벗어나 서양인들도 입을 수 있는 디자인을 고안해냈다.
2012년 제조업체로 법인 전환을 한 뒤 기술력을 집약, 지난해 '꼬레아노(www.꼬레아노.kr)'라는 브랜드를 시판했다.
실크하우스 김윤정 디자이너가 한복 저고리에 입체수를 놓고 있다.
말로만 한복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외국인이 입을 수 있는 캐주얼 한복을 만들어낸 것이다. 얼핏 보면 서양 의복 같은 재킷, 드레스, 원피스에도 한복 디자인을 접목시켰다.
반응은 고무적이었다. 처음 출시됐을 때 수도권 20~30대 젊은층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 고궁 나들이나 해외여행 복장으로 안성맞춤이라는 칭찬이 줄을 이었다.
그 바람을 타고 최근엔 40~50대 중장년층과 외국인들이 이 제품을 찾고 있다고 한다. 패션쇼 등에서나 구경하던 고급 한복이 아닌 하와이 와이키키나 프랑스 파리에서도 입고 다닐 수 있는 캐주얼 한복이 상용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업체는 기세를 몰아 올해 해외 시장 개척에 더욱 주력한다는 구상이다. 미국과 일본, 중국, 유럽 등의 교민은 물론 푸른 눈의 외국인에게 캐주얼 한복을 입히는 게 제1의 목표다.
현재 한복을 수출하는 국내 업체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충북의 수출 중소기업으로 촉망받는 실크하우스가 해쳐나갈 시장은 무궁무진하다.
정 대표는 "단순히 보는 아름다움이 아닌 생활 속에서 즐기는 아름다움을 찾고 싶다"며 "전통을 현대사회와 접목,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복을 만들어내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 임장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