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상수도과에서 근무하던 나는 문화유산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농로포장, 아스콘 덧씌우기, 제설, 상수도 급수시설 등 SOC 사업에 익숙하던 내가 문화유산팀이라니.
고향 신니면에는 숭선사지, 견학리 토성, 고인돌 등 국가유산이 제법 있었지만 관심 밖이었으며 누구보다 역사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업무에 대한 설렘이 있었다. 국가유산 관리 및 보수 업무를 담당하며 생소한 용어와 까다로운 보수업무 절차에 많은 착오가 있었지만,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지난 5월 충주문화원이 주관하는 '고구려 역사 문화탐방' 프로그램을 통해 고구려 유적 답사를 가게 됐다.
선양(심양)에서 4시간 남짓 달려 고구려 백암성에 도착했다.
멀리서 바라봤음에도 백암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임이 느껴졌다.
태자하 동남향으로 흘러가며 높이 5~6m, 둘레 2천m 성벽과 5개의 치(稚)는 웅장함이 넘쳐흘렀다.
서기 645년 성주 손대음의 모반으로 성을 당태종 이세민에게 내어 줬다.
금성탕지의 성을 왜 그렇게 쉽게 내어 줬는지, 망대인 점장대에 올라 태자하를 바라보며 당시 고당전쟁과 동북아 맹주 고구려의 멸망 과정을 회상할 수 밖에 없었다.
이튿날 환인시에서 용두산 망강루 고분군 주몽왕릉이라고 추정되는 곳을 답사하고, 오녀산 박물관 견학과 고구려 첫 도읍지(당시 졸본)로 비정되는 오녀산성을 답사했다.
고구려성의 특징인 옹성이 눈에 띄었다.
단둥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고구려 15대 왕인 미천왕릉인 서대묘와 돌무지 무덤인 천추총도 눈에 담았다.
집안현으로 이동하는 3일째에는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와 장군총에 방문했다.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두 태왕의 업적이 새삼 떠올라 감개가 남달랐다.
평양 천도가 일어난 427년까지 고구려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국내성은 내외벽을 잘 다듬은 석축성으로 모서리에 각루터가 있고 4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치가 설치됐다.
기와, 막새기와, 구리불상, 토기조각들이 발견됐지만 아무래도 시가지가 형성되어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는 않아 보였다.
만주벌판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국내성의 비좁음에 과연 이곳이 '대국의 수도일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은 국내성을 비롯한 6개 성의 주민과 당에 투항했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전성기와 멸망이 공존하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고구려의 웅비인 광개토대왕릉비를 직접 보니 고구려의 기상을 느낄 수 있었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태호에서 자국의 천하관과 찬란했던 전성기의 자신감을 볼 수 있었다.
고구려의 여정은 668년 끝이 난다. 고구려의 멸망은 귀족들의 분열과 연개소문의 장기집권 후유증에서 비롯됐다.
몰락한 고구려를 보며 영원히 강성하거나 영원히 약소할 수 없는 것이 역사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한비자(韓非子) 유도'에서 이른 '국무상강무상약(國無常强無常弱)'이 떠오른 답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