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년전 부강지역 사람들, 어떻게 살았을까

충북대 신영우 명예교수
민가 규모 2.5칸 정도로 '초가삼칸'이 채 안돼
내륙 하항으로 기능… 부재지주 의외로 많아
금강변 위치… '이생포락'이라는 독특한 현상

2016.08.29 18:14:14

부강지역은 지금은 세종시에 편입됐지만, 근대기까지 청주 경제의 관문 역할을 한 곳이다. 부강지역 금강 일대 모습.

[충북일보] 부강지역은 지금은 세종시에 편입됐지만, 근대기까지 청주 경제의 관문 역할을 한 곳이다.

부강은 금강 물길의 내륙하항 종점으로 기능하였고, 이를 통해 서해의 각종 해산물과 소금이 청주지역으로 반입됐다.

그런 부강지역 사람들은 1백년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신영우(사학과) 충북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1백년전 부강지역 사람들의 삶은 <문의군양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대한제국기 고종 정부는 세금부과를 정확히 하기 위해 측량작업을 전국적으로 실시했고, 그 성과물을 광무양안이라는 지대장부로 만들었다.

<문의군양안>도 광무양안사업의 일종으로, 지난 1900년에 작성되었다. 지금의 부강지역은 문의군의 여러 면(面) 가운데 주로 '삼도면'(三道面)에 속해 있었다.

신교수는 <문의군양안>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을 통해 △당시 집의 규모 △집의 종류 △지주(地主)의 분포도 등 1백년전 부강지역 사람들의 주거상을 상당부분 복원하였다.

그는 "삼도면을 포함한 문의군의 집 규모는 2.5칸 정도인 것으로 분석됐다"며 "이는 같은 광무양안기의 충주지역 규모보다 다소 작은 수치"라고 밝혔다.

전통건축 개념의 '초가 3칸'은 부엌 1개에 방 2개가 딸린 집을 의미한다. 따라서 2.5칸'은 부엌 1칸에 방 2칸이 채 안 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삼도면이 포함된 문의군 지역의 기와집 수는 의외로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문의지역의 기와집 칸수는 568칸으로 전체 호수의 0.13%를 차지하였다. 이는 대읍이던 충주지역의 기와집 비율 0.04%보다 3배나 많은 수치이다.

이처럼 부강지역에 부자의 상징인 기와집이 많았던 것은 내륙하항이 위치했고, 또 대청호로 수몰된 지역에 당시에는 비교적 넓은 경작지가 존재했기 때문으로 파악됐다.

신교수는 지주의 분포도에 대해 "홍순형, 민응식 등 부재지주가 많았던 점이 주요 특징이 되고 있다"며 "29명의 지주 가운데 14명이 부재지주였고, 이 가운데 홍순형은 부강은 물론 문의를 통털어서도 제일가는 땅부자였다"고 밝혔다.

홍순형은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비 조카로 한성판윤과 경기감사 등을 지낸 인물이고, 민응식은 명성황후 음성 도피를 도왔던 외척의 한 명이다.

이처럼 부강지역에 부재지주가 많았던 것은 역시 부강지역이 지니고 있는 입지성 때문에 토지 소유와 분산이 유리했기 때문으로 분석되었다.

이밖에 신교수는 부강지역 지리적 특징의 하나인 '이생포락(泥生浦落)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생(泥生)'은 강이나 하천 연안에 퇴적되어 새로 생긴 땅을 의미하고, '포락(浦落)'은 반대로 물의 흐름에 의해 떨어져 나간 땅을 말한다.

그는 "공주군에 속하던 땅의 일부가 물줄기가 바뀌면서 부강지역에 붙게 됐고(이생), 당시 부강 주민들은 이 모래톱을 경작하였다"며 "그러나 본래 그 땅은 공주에 속하던 땅이었기 때문에 공주군의 행정력이 미치는 진풍경이 1백년 전에 존재하였다"고 밝혔다.

신교수의 이같은 연구 성과는 곧 발간될 '부강면지'에 수록될 예정이다.

/ 조혁연 객원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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