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진천지역 최고명문 '오척' 집안

2017.01.10 17:36:45

조혁연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明황후가 된 우리고장 진천 출신 吳공녀의 본관은 보성(寶城)이고, 그 가운데 양무공파(襄武公派)에 속한다. 『보성오씨 양무공파 세보』 에 의하면 양무공파는 1세조 현필(賢弼)부터 9세 윤정(允貞)까지는 인명과 계보가 다소 불확실하다. 따라서 “구전 족보의 기록을 기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후는 사실을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10세 현우(玄祐), 11세 용권(用權), 12세 맹손(孟孫), 13세 자경(子慶·오황후 고조), 14세 연순(延純·오황후 증조) 등의 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14세 연순은 찬(璨), 희(希), 집(執) 등 3형제(15세)를 뒀고 이 가운데 ‘집’이 오황후의 조부가 된다.

그는 슬하에 오황후의 친부인 오척을 비롯해 비(備)·엄(儼)·한(한人+閒)·부(傅)·전(佺) 등 6형제(16세)를 뒀다. 이 가운데 오척은 맹선(孟璿), 숙선(淑璿) 등 두 아들(17세)을 뒀고, 이들이 오황후와 오누이간이 된다.

비·엄·한·부·전 등 오황후의 삼촌에 해당하는 5형제는 모두 현감 이상의 품관에 오르는 등 입신출세하였다. 오비는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정랑(정5품)을 거쳐 통훈대부(정3품)에 올랐다.

오엄은 연산현감(連山縣監)을 역임하였고 묘는 청주시 명암동 산26에 부인 황씨와 합장돼 있다. 『세종실록』에 세종이 오엄에게 수령이 임지에 나가 지켜야 할 ‘수령칠사’를 당부하는 말이 나온다.

‘연산현감 오엄(吳儼)이 사조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환곡의〉 거둬들이고 흩임을 삼가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수령의 선무(先務)이니, 가거든 조심하여 시행하라.” 하였다.’-<세종실록 22년 10월 2일>

오한은 현감(종6품)과 동부승지(정3품)를 역임하였고 묘는 청주시 남이면 갈원리 산7에 있다. 그리고 오부는 단양현감을 지냈고, 묘가 청주 남이면 갈원리에 있다. 역시 실록에 세종이 수령칠사를 당부하는 말이 기록돼 있다. 내용은 오엄과 비슷하다.

‘판강진현사(判康津縣事) 오부(吳傅)와 삼화현령 정선(鄭詵)이 하직을 고하니, 불러 보고 이르기를, “수령의 임무는 백성을 편하게 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또 수차(水車)로 한재를 방비함이 중한 일이므로 법대로 배치하면 백성에게 크게 유익할 것이다.” 하였다.’-<세종실록 13년 7월 16일>

현사(縣事)는 지방행정조직인 주·부·군·현(州府郡縣) 중에 현을 담당하는 지방의 수령이었다. 조선초기에는 현사라 불렸으나 나중에는 현의 크기에 따라 현령과 현감으로 나눠졌고 전자는 종5품, 후자는 종6품의 품계를 지녔다.

'점재필집'에 오전(吳佺)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오전에 관한 내용은 김종직의 문집인 『점필재집』에 실려 있다. 『점필재집』은 오전에 대해 ‘보성인(寶城人)인데 벼슬이 용담(龍潭)현령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하였다.

오황후 삼촌들의 입신출세가 황족 오척에 대한 배려에 힘입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것에 관계없이 오척 6형제의 출세는 조선전기 진천지역의 최고 명문사족으로 불려도 과하지 않아 보인다.

오척 형제의 묘가 현도면과 가까운 남이면에 많이 분포하는 것도 눈여겨 볼만 하다.

/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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