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공녀 친부 오척, 황족으로 대우받다

2016.12.27 18:21:57

조혁연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한확(韓確 , 1403~1456)은 청주가 관향으로, 태종~세조 등 4임금을 모셨다. 그는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고,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등 영달을 누렸다. 그 바탕에는 여말선초의 공녀(貢女) 제도가 있었다. 그는 누이에 이어 막내 여동생(한계란)을 명궁에 공녀로 전헌하였다.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니, 한씨가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하여 약을 쓰려 하오.” 하고, 칼로 제 침구(寢具)를 찢고 갈마 두었던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흩어 주니, 침구는 장래 시집갈 때를 위하여 준비했던 것이었다.’-<세종실록 9년 5월 1일>

한양도성 안 사람들은 한계란의 그런 명궁행을 ‘생송장’이라고 부르며 슬퍼하였다.

《세종실록》 23년 7월 22일. '영춘현감 오척’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도성 안 사람과 사녀(士女)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의 형 한씨가 영락궁인(永樂宮人)이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이었는데, 이제 또 가는구나.” 하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이때 사람들이 이를 생송장(生送葬)이라 하였다.’-<세종실록 10년 10월 4일>

조선 조정은 공녀 간택에 대한 대가로 친권자인 친부에게 승진의 혜택을 줬다. 우리고장 진천 사람이면서 자신의 딸을 명궁에 공녀로 진헌한 오척(吳倜)도 여기에 해당돼 우군 부사정(副司正, 종7품)에서 사정(司正, 정7품)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무반으로는 흔치 않게 충청도 영춘현감(종6품)으로 거푸 승진, 국왕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영춘 현감 오척이 하직하니, 인견하고 말하기를,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형벌을 가볍게 하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자의 선무(先務)이다.” 하고(하략)’-<세종실록 23년 7월 22일, 그림>.

그러나 오척은 바람기가 많았고 관료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오척은 한때 “천첩 중덕(重德)을 사랑하여 그의 본처 박(朴)씨를 버리고 첩을 말에 태운” 죄로 사헌부의 치죄(장형 80대)를 받게 되었다. 이때 세종이 내린 결정은 “오척은 황친(皇親)이니 논하지 말라”(세종실록 12년 9월 18일)는 것이었다.

그는 영춘현감 재직시 개간한 밭 40여 결을 묵은 밭[陳田]으로 처리하고 세를 거뒀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8년 4월 15일).

이런 오척은 황친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조선뿐만 아니라 명나라 조정의 주목도 받았다. 세종 9년 吳공녀를 간택해 명궁으로 데려갔던 명나라 내관 윤봉(尹鳳)이 문종 즉위년(경태 1)에 다시 조선을 찾았고, 이때 오척을 서용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오척이 황친(皇親)이기 때문이었다.

“황친들은 모두 사모(紗帽)를 썼는데도 유독 오척만은 갓[笠]을 썼습니다. 중국에서는 대궐 북쪽에 별도로 관(觀)을 짓고는 황친 중에 임사(任使)할 만한 사람을 두고, 그들을 승진시켜 천호, 백호, 진무 등 관원으로 삼고, 재능이 없는 사람은 사무를 맡기지 않고 다만 그 봉록만 받게 할 뿐인데, 지금 오척도 또한 이 예에 의거하여 서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문종실록 즉위년 9월 5일.>

서용은 죄를 지어 면관(免官)되었던 인물을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오척이 조선과 명나라 양조로부터 지속적으로 대우를 받은 것은 황족으로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 충북대 사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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